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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하고 무질서해서 아름다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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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하고 무질서해서 아름다운 도시
  • 정은영
  • 승인 2016.11.25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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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의 미술사산책] 로버트 앙리의 ‘눈 쌓인 뉴욕 풍경’

진흙탕 거리·공장의 검은 연기도 미적 대상
칙칙한 색채·거친 붓질로 질퍽한 거리 그려

 

몇 년 전 겨울, 리서치를 위해 잠시 방문했던 미국 북동부 지역은 연일 폭설과 한파가 끊이지 않았다. 눈보라와 함께 기록적인 폭설이 계속되던 뉴욕의 맨해튼은 오랜 전 그림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1902년에 그려진 로버트 앙리(Robert Henri)의 ‘눈 쌓인 거리 풍경(Street Scene with Snow)’이다. 이미 100여 년 전에 그려진 뉴욕 거리가 낯익은 풍경으로 생생하게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이는 대도시 특유의 겨울 풍경 때문일 것이다.


도시에 내리는 눈은 시골에 내리는 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새하얀 솜뭉치가 소리 없이 내려와 나무나 지붕을 고요하게 뒤덮는 시골의 눈과는 달리, 도시의 눈은 높은 빌딩 사이로 세차게 몰아쳐 와서는 소복이 쌓일 틈도 없이 즉시 치워지거나 거리의 흙먼지와 지저분하게 뒤섞여 질퍽한 눈 흙탕길로 변하기 일쑤다.

 


앙리의 그림에는 그렇게 눈과 뒤섞인 질퍽한 흙탕길이 캔버스 하단의 하얀 삼각형을 가르며 화면 안으로 뻗어 있다. 검은색 마차가 밟고 지나간 눈길은 여지없이 거리의 흙먼지와 섞여 그림의 정중앙에 지저분한 눈 흙길을 만들어 놓았다. 아이스음료 슬러시처럼 뒤섞인 눈 흙길의 축축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질퍽한 눈 흙탕길로 인해 이륜마차나 브라운스톤 건물마저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뉴욕시 57번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그림은 1902년 3월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같은 크기의 캔버스를 세로로 놓고 눈 내린 뒤의 맨해튼 거리를 그린 또 다른 그림이 있는데 1902년 3월 5일이라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해 3월 초 눈보라가 지나간 후의 맨해튼을 담은 이 두 그림은 잔뜩 흐린 하늘과 도시의 질퍽한 거리가 소재이자 주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눈 내린 후 도시의 지저분한 거리를 좋아하는 이는 없다. 눈은 탐스럽게 내릴 때나 소복이 쌓여 있을 때는 그지없이 아름답지만 도시의 흙먼지와 섞여 녹기 시작하면 여간 불편하고 추한 게 아니다. 눈 내린 후의 도시 거리가 추하게 여겨졌던 건 뉴욕이라는 대도시가 그 모습을 완성해가던 20세기 초에도 마찬가지였다. 쌓인 눈이 녹아 질퍽해진 거리를 화폭에 담은 이가 많지 않은 이유다.

 


흥미롭게도 로버트 앙리가 눈 온 뒤의 뉴욕을 그린 이유는 바로 그런 도시의 거리를 흔히들 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누는 잣대는 고루한 아카데미의 진부한 규율에 지나지 않았다. 세기의 전환기에 유럽으로부터 건너온 인상주의 회화 역시 그에게는 전통적인 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것에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이끌었던 일군의 젊은 화가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진흙탕이 된 도시의 거리,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공장의 굴뚝, 이민자와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저잣거리 등 도시의 추한 모습이 앙리와 그를 따르는 미술가들에게는 더없이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대상이었다.


그들의 캔버스가 밝고 화사한 파스텔 톤이나 부드러운 터치 대신 어둡고 칙칙한 색채와 거친 붓질이 지배적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담뱃재처럼 지저분하고 칙칙한 그림을 그린다고 하여 그들에게 붙여진 ‘재떨이 화파(Ashcan School)’라는 이름이 앙리에겐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저분하고 무질서하지만, 시끄럽고 어수선하지만, 도시는 오히려 그로 인해 아름답다. 추한 도시의 아름다움이랄까. 그러나 다시금 생각해보면, 세상에 추한 존재는 없다. 로버트 앙리의 말대로 모든 것에 아름다움이 있고 어디에서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올 겨울에 혹시라도 지저분한 도시의 눈길을 걷게 된다면 ‘재떨이 화파’의 아름다운 그림을 상기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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