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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폭력에 대한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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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폭력에 대한 절규
  • 유현주
  • 승인 2016.11.25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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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주의 문학과 미술사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애플브룩의 ‘모나리자’

만약 당신이 채식주의자가 되고자 한다면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육식 위주의 요리에 질려버릴 지도 모른다. 곧 우리 사회가 ‘육식을 권하는 사회’라는 것을 의식하게 될 테니. 채식은 부지불식간 몸에 익힌 많은 습성들을 돌아보게 한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식습관, 취향, 가족제도 등의 관습들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사회적 관습이, 혹시 사회가 나에게 강요해온 폭력은 아니었는지를 말이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시아 최초의 맨부커상 수상이라는 책의 광고보다는, <채식주의자>란 제목 때문에, 그리고 가까운 외국인 친구가 그 책을 필자에게 권한 것이 일독을 하게 된 계기였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섬세한 묘사와 시어 같이 짧고 감각적인 문장들을 구사하는데다 관습을 깨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독자를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주인공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면서 한편으로 지독히 고독을 앓는 사람들이다. 소설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렇게 3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채식주의자’ 이야기는 주인공 영혜가 기이한 꿈을 꾸고 난 후부터 채식을 선언하는 과정과 가족들과의 갈등을 다룬다. 채식만을 고집하는 영혜는 남편에게는 상식 밖의 사람으로 그려진다. 채식주의자가 되고나서 모든 육류와 생선을 냉장고에서 꺼내버리기 시작한다. 가족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아버지가 강제로 권유하는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발악하다가 끝내 과도로 손목을 긋기까지 한다. 영혜는 남편에게 지극히 ‘비정상적인’ 여자다.


두 번째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인 예술가와 영혜의 이야기다. 그는 식물 문양의 바디페인팅을 한 남녀의 교합된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던 즈음, 어느 날 처제인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얘기를 우연히 아내에게 듣게 된다. 마치 전광석화처럼 스치는 이미지, 즉 여인의 엉덩이에서 작고 푸른 꽃잎이 피어나는 환상을 떠올린 그는 자신의 남성이 발기하는 전율을 느끼며 그가 추구해온 예술적 이미지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얻는다.


영혜를 찾아가 바디페인팅을 제안한 그는 그녀의 허락을 받아내고 꽃을 그녀의 몸에 그리는 작업에 착수한다. 마침내 그는 영혜와 교접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면서 비디오 영상으로 예술작업을 완성시키지만, 그 비디오를 본 아내에 의해 두 사람은 정신병원으로 후송된다.


세 번째 ‘나무 불꽃’에는 영혜를 바라보는 언니의 시선이 담겨있다. 성실한 큰딸로, 아내로, 엄마로, 자수성가한 착한 여자로 살아온 인혜는 목숨을 버리려하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의 삶을 허무하게 느낀다.


소설은 우리 사회의 폭력적 ‘관습’에 대한 질문을 꺼내기 시작한다. 가령 영혜의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버릇에 대해 남편과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 그리고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에 대한 차가운 시선과 염려를 통해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묻는다. 그것이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어떤 관습이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함부로 대할 권리가 있는 것인가? 동물-인간이 또 다른 동물을 먹는 괴이한 이미지들의 악몽에 시달리는 영혜가 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이 식물이 되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에서 저자는 영혜의 형부를 통해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의 예술가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심지어 가족과도 소통할 수 없는 이 예술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후기자본주의 시스템을 비웃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바로 곧 영혜의 몸에 식물을 그린 진짜 이유가 아닐까?


이 두 남녀의 사랑행위에 많은 독자들이 경악하는 이유는 우리의 관습이 허용하지 않는 관계라는 데에서 온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와 사랑, 결혼제도에 대한 질문을 유도하는 저자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만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이 자본주의의 포식활동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빼앗는 것에 그들은 관심이 없다. 영혜에게는 자신의 동물성을 지우려고 하는 것, 형부에게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미학만이 중요하다. 저자에게는 그러한 비자본주의적 삶 자체가, 인간 중심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로만 굴러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의 반어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혜의 채식은 아마도 사회의 시스템이 형성한 관습의 폭력에 저항하는 몸짓이자, 그 폭력에 희생된 인간의 내적 자연을 회복하고자 하는 갈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에 흐르는 고통의 언어들을 시각화할 수 있는 작가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에 편재하는 폭력의 문제, 특히 여성이나 약자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현존하는 작가 아이다 애플브룩을 소개하기로 하자.

 


 

아이다 애플브룩의 ‘모나리자’와 폭력의 이미지


아이다 애플브룩(Ida Applebroog)의 작품을 필자가 만난 것은 2012년 독일의 카셀도큐멘타 전시에 갔을 때였다. 카셀도큐멘타는 5년마다 독일의 카셀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규모의 전시 중 하나다. 그 전시 이후로, 필자는 아이다 애플브룩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노장의 이 여성작가는 많은 경력과 훈장을 지니고 있었다. 1929년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난 아이다 애플브룩은 뉴욕주립대학 응용예술과학 인스티튜트에 다녔고, 1956년 시카고로 이주해서 살다가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에서도 공부했다. 1977년부터 애플브룩은 메일을 통해 자기가 출간한 책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이단적인 예술과 정치학, 페미니즘 그룹에 합류한다. 예술교육 등 평생공로에 헌정하는 대학미술협회수훈아트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수상했으며,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코코란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PBS다큐멘터리에서 ‘아트 21 : 21세기예술’로 다뤄지기도 했다.


카셀에서 만난 애플브룩의 작업은 아름답거나 고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그림은 산닥나무로 만든 안피지위에 그린 것이 많은데, 화상을 입은 것 같은 얼굴에 눈이나 입만 그리거나 몸엔 성적인 특징만 남겨둔다. 인형 같은 모습의 그 드로잉들은 그녀가 일찍이 예술 작업으로 인형을 만들었던 경험과도 무관치 않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표정이 풍부한 눈이 말해주는 것은 어떤 상처나 후유증과 같은 흔적이다.


무엇이 이런 기묘한 표정과 몸통의 작업을 하게 만들었을까? 60년대 페미니즘이 생기기전부터 애플브룩의 의식은 이미 페미니스트였고 폭력에 항거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일례로 그녀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교수에게 들었던 제일 큰 칭찬이 고작 “너는 남자들만큼이나 그림을 잘 그린다”는 평가일정도로,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혐오가 애플브룩에게 싹트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미국여성들과 달리, 자신이 직접 애플브룩이란 성을 붙였고, 이 성을 지금도 쓰고 있다.


카셀도큐멘타 전시장에서 성적인 농담을 종이에 적어서 설치했던 작품은 아마도 애플브룩이 늘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들인,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고나 드라마, 뉴스 등에서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폭력에서 온 것들일 것이다. 전시장에서 그 작품들은 나치즘으로 희생된 유대인 이야기와도 맞물린다. 특별히 정치적인 입장이나 구호는 없지만, 작가는 솔직하고 냉담하게, 추하고 견디기 힘든 이미지들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숨은 폭력의 흔적들을 드러낸다.
    

잘 잊히지 않는 애플브룩의 작업 중 하나가 ‘모나리자’ 시리즈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여성의 성기를 드로잉 한 작품이다. 그녀는 드로잉 종이들이 전시 공간의 거대한 벽을 가득 메우도록 설치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작품은 기이하게도 그 전체가 거대한 풍경화, 혹은 조각이나 벽화처럼 느껴지면서 그러한 불편함은 곧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 이미지 자체를 폭력으로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불편 혹은 불쾌함’ 자체가 작가의 의도일수도 있다. 마치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우리가 익히 상식이라고 하던 것들을 넘어서는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기한 것처럼 말이다. 아이다 애플브룩의 작업 역시 우리사회, 우리 내면에 있는 폭력들을 가시화하기 위한 폭력 그 자체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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