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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 대운(大運) 오면 도덕정치 펼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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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 대운(大運) 오면 도덕정치 펼쳐지리라
  • 이길구
  • 승인 2016.11.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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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 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5>청와대의 세종시 이전 당위성 2

지난주에는 청와대를 왜 옮겨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현재 서울의 지기쇠운(地氣衰運)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한마디로 서울은 땅기운이 다했다. 사실 확인은 TV만 켜보면 다 안다. 그럼 이번에는 어디에다 청와대를 옮겨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계룡산하다. 여기에 세종시가 바라보는 가시권지역이면 더욱 좋다. 이젠 청와대와 세종시는 구분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계룡산이 왜 명산(名山)이고 영산(靈山)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번 기회에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한 계룡산의 형세를 지리학적으로 세밀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서술순서는 먼저 조선의 수도이전과 계룡산의 인연을 알아보고 다음에는 계룡산의 형세가 우리에게 주는 복합적인 의미를 살펴본다. 

 

계룡산 천도 불가 핑계된 하륜의 거짓 풍수

 

 

예로부터 계룡산은 풍수적으로 천혜의 명당(明堂) 중 명당이었다. 오죽했으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제일먼저 계룡산을 후보지로 여기고 1년 동안 축조공사를 하였을까. 지금의 계룡대가 들어온 곳이 당시 수도후보지였던 신도안이었다. 하지만 운이 없어서 그런지 당시 하륜(河崙)이라는 작자가 계룡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펼쳐 받아들여졌다. 억울하고 분한 일이다. 필자는 당시 최고의 풍수지리 전문가인 하륜이 왜 계룡산 천도를 반대했는지 의구심이 많았다. 그의 반대 이유부터 찾아보자. 


하륜이 반대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남쪽에 너무 치우쳐 한반도의 중심이 아니다. 둘째 주변에 큰 강이 없어 교통이 불편하다. 셋째, 계룡산의 풍수가 ‘흘러가는 물이 땅의 기운을 약화시켜 나라가 쇠망할 곳이다. 당시 조선의 영역이 한반도 전체였음을 볼 때 계룡산이 남쪽에 치우친 것은 일단 수긍이 간다. 또 계룡산에 금강이 있지만 당시 문물의 이동이 조운(漕運)에 따라 이전한 것을 볼 때 이 역시 문제점은 있었다.


다만 풍수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하륜이 계룡산의 참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륜이 증거로 제시한 수파장생(水破長生), 즉 ‘물이 장생방(長生方)으로 흘러 땅의 기운이 약하고 쇠망하다는 것’은 사실 계룡산과는 무관하다.  


계룡산은 내수구가 동남방으로 흘렀으나, 이 물이 길게 동남방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 아니고 대둔산에서 내리는 물과 합류하여 동북방으로 흘러 수전현무격(水纏玄武格, 물이 북을 돈다는 뜻)으로 계룡산 후록을 감싸 돌아서 서남으로 흘러 서해안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산은 좌선(左旋)으로 돌고, 물은 우선(右旋)으로 돌아 ‘산태극수태극’으로 형세를 이루어 수파장생(水破長生)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이태조가 하륜의 주장을 핑계로 계룡산 천도를 포기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계룡산이 거리가 너무 멀어 한양에 도읍했다는 분석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이는 이유다. 실제 이태조는 낙산(樂山) 동쪽 한강 가에 동남으로 펼쳐진 넓은 곳을 왕궁 터로 삼으라는 하륜의 건의를 뿌리치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주장한 현 경복궁과 창덕궁 자리로 결정했다.


태조산소조산에 경건한 예 드리는 ‘회룡고조’의 형상

 


계룡산은 천황봉을 비롯하여 주변의 쌀개봉·삼불봉·연천봉 등 꼭대기 봉들의 높이가 거의 비슷해 이들 봉우리들을 연계해보면 풍수지리학으로 ‘일자형(一字形)’이라고 한다.  이런 모습은 신원사 뒤편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이 일자형 연봉(連峰)들이 북쪽의 끝인 연천봉을 만들어 멀리 태조산(太祖山)인 백두산(白頭山)을 향해 경건한 모습으로 예(禮)를 드리는 모습이다.


남으로는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머리봉·국사봉이 소조산(小祖山)격인 대둔산(大芚山)을 향해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정성껏 문안을 드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남과 북으로 이루어진 것을 ‘회룡고조(回龍顧祖)’라고 한다. 이는 계룡산이 근본을 잊지 않고 윤리도덕을 간직한 명산 중의 명산이란 증거다.


우리나라 산맥을 크게 구분해 보면 백두산으로부터 금강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에 이르러 한줄기는 영양한티를 지나 경북 산천을 이루었고, 또 다른 큰 줄기는 속리산을 거쳐 문경새재와 추풍령을 지나 덕유산에 이르러 남으로 뻗어 경남산천을 만들었다. 또 주맥(主脈)이 지리산에 이르러 호남산천이 펼쳐졌다고 본다.


이 산맥들이 동북에서 출발하여 서남을 향해 2000여리를 쭉쭉 뻗어 내려갔는데 유독 계룡산만 덕유산과 지리산 사이에서 거대한 줄기가 북을 향해 마이산·운장산·대둔산·천마산을 거쳐 300여리를 힘차게 달려와 형성했다. 모든 산맥들이 남으로 서남으로 가고 있는데 왜 계룡산은 북으로 머나 먼 길을 되돌아 올라오고 있을까? 이것은 분명히 자기의 뿌리요, 근본인 태조산인 백두산을 잊지 못하고 돌이켜보면서 엄숙하고 경건하게 문안을 드리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산태극수태극’ 도덕정치의 표상

 


그럼 이 계룡산이 어떤 모습으로 솟아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지리학적으로 논한다면 마이산에서 천마산까지 수백 여리를 북으로 왔으므로 이것을 음룡(陰龍, 북으로 향하여 가는 산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산맥은 천마산에 이르러 평지행룡(平地行龍)하여 환골탈태(換骨奪胎)로 겁기(劫氣, 험한 산의 무시무시한 기운)를 벗고 엄사리를 거쳐 구럭재를 돌아 남산봉을 일으킨 후 주맥이 짧은 과협(過峽, 골짜기를 지나침)을 거쳐 서쪽으로 높이 솟아 일대평강(一大平崗)이 이 중심을 향해 오르고 있다. 이 올라가는 북쪽 계곡에는 신원사가 있고 남쪽 계곡은 서용추(수용추)를 이루고 있다. 계룡산은 한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것이 아니고 남북으로 수백리 터를 일자형(一字形)으로 해발 900미터 가까이 높이 솟은 것이다.


그래서 계룡산을 ‘조상(祖上)을 돌아보는 형세와 같다’하여 앞서 말한 ‘회룡고조’라고 하고 일부 풍수가들은 계룡산을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세(勢)’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살펴보면 회룡고조는 산태극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된다. 이에 반해 수태극은 물의 발원지에 의해 구분되는데 크게 ‘대태극(大太極)’과 ‘소태극(小太極)’으로 나뉜다.


소태극은 계룡산에서 시작된 물이 신도안에서 두계천이 되어 동남으로 빠졌다가 다시 동북으로 거슬러 금강으로 합류하는 것을 말한다. 지역으로 보면 신도안에서 두계천을 거쳐 갑천을 지나 부강에서 금강과 마주치는데 대태극은 전북 장수에서 발원한 금강이 장수-진안-무주-영동-갑천(대전)-부강을 지나 공주-부여-강경을 거쳐 군산과 장항사이의 서해로 들어가는 물길을 형성하고 있다.


또 계룡산은 좌측으로 돌아 들어옴에 물이 이어지고(山則左旋積水), 물은 우측으로 들어옴에 또한 산을 감싸고(水則右旋積山)있는 것과 같다. 이는 산도 을(乙)자형으로 돌고 물도 을자형으로 돌아 거대한 태극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산태극수태극’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래서 계룡산을 도덕정치의 표상(表象)으로 여기며 이곳에 청와대 등 수도가 내려오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할 수 있는 적지(適地)라고 본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계룡산은 천황봉의 주맥(主脈)이 형제봉(兄弟峰)을 거쳐 힘차게 내려오다가 제자봉(帝字峰)을 일으키고, 이 봉우리가 한 줄기 옆으로 떨어져 은은하게 바닥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가 이태조가 삼일역사(三日役事)를 했다는 곳이다. 이곳을 우리 부락민들은 ‘서(西)대궐터’라고 한다.


이 봉에서 여맥(餘脈)이 내려와 조그만 봉을 거쳐 장구산 중봉에서 끝을 맺는데, 이런 형상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고 하고, 장구산 중봉은 ‘알봉’이라고 보면 된다. 천황봉이 제좌형(帝座形)으로 특립(特立)하였으므로 제왕의 자리라 하겠으나, 주맥의 기운을 바로 받지 못하고 옆으로 들어왔고 높이 솟은 매봉이 있어 절제(節制)를 받으므로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국권(國權)을 독재하지는 못한다고 보여 진다.


또 지리학에서 물은 ‘재물(財物)’이라고 보는데 이 자리는 물이 너무 부족하다. 왼쪽 수용추에서 내려오는 물이 장구산 중봉을 거쳐 물을 거둬주기는 하였지만 수세(水勢)가 약하여 ‘내탕금(內帑金)’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밖으로부터도 큰 조공(朝貢)이 없으므로 비록 왕위에 있으나 국가 경제권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할 것 같아 이 자리는 왕위는 계승하겠으나, 영국식 왕실제도와 같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민본주의 사상으로 도덕정치가 구현되리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위왕산(衛王山) 내수구(內水口)까지 동남으로 거수국(去水局)으로 되어서 가장 청빈(淸貧)한 자세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효의 원리' 지닌 산

 


성인의 말씀에 ‘위인(爲仁)이면 불부(不富)요, 위부(爲富)면 불인(不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해석하면 ‘어질고 착한 일을 하려면 부자가 될 수 없고, 부자가 되고자 하면 어질고 착한 일을 못 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청빈(淸貧)함을 지키게 되면 물욕(物慾)을 탐할 수 없고, 물욕을 탐하지 않으므로 도덕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계룡산은 이런 산세로 말미암아 도덕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본다. 특히 계룡산이 갖는 철학(哲學)적인 의미는 또 있는데 바로 ‘효(孝)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산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지능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어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부른다. 짐승과 인간의 구별 기준은 윤리도덕을 지키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우리가 뿌리와 근본을 잊지 않고 조상을 숭배하고 부모를 받들어 효도를 다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래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에 있다’고 하였고 위대한 인간들은 산천의 영기(靈氣)를 받아서 태어난다고 하였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산천의 지기(地氣)를 받아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이야기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우주생성(宇宙生成)의 원리라고 아니할 수 있다.


계룡산은 뿌리를 잊지 않고 근본을 망각하지 않는 명산이다. 앞으로 다가올 이 산의 신령(神靈)한 기운(氣運)을 받는다면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윤리도덕이 세계만방의 종주국(宗主國)이 되지 않겠나? 계룡산에 대운(大運)이 오면 훌륭한 도덕정치가 된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필자가 계룡산하에 청와대 등 나라의 핵심기관을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다음 주에는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고 앞으로 어떤 정부형태를 만들어야만 대한민국이 위대한 민족으로 번영할 수 있는지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③‘계룡산 형상으로 본 정부형태’에 대해 연재할 예정이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대한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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