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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성은 조선왕 기준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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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성은 조선왕 기준의 흔적(?)
  • 이길구
  • 승인 2016.10.2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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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2> 산성을 찾아서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845.1m)과 쌀개봉(827.8m)에 올랐다. 원래 이 지역은 군사보호구역 겸 등산로 폐쇄구역이다. 가을이 다가기 전에 꼭 찾아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간신히 허락을 얻었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계룡산 정상에 이어진 산성을 확인하는 일과 두 번째는 마명암(馬鳴菴)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쌀개능선에서 바로 본 주변의 전경은 환상적이다. 동쪽에는 신도안의 전경이, 서쪽에는 계룡저수지와 경천 뜰이, 남쪽에는 한일 자(一)로 연결된 능선이, 북쪽에는 문필봉, 연천봉을 비롯한 여러 봉우리가 계룡산과 주변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계룡산에 10리길 산성 진짜 있었다

 


쌀개봉은 계룡산의 장군봉·천왕봉·수정봉과 함께 암릉(岩陵)으로 된 봉우리다. 이 중 제일 험한 봉우리는 단연 쌀개봉이다. 능선을 따라 15분이 지나니 커다란 암벽이 가로 막는다. 우측으로 돌아가니 통천문(通天門)이 나온다. 대략 헤아리니 폭이 2.3m, 길이가 4m 정도 된다.


통천문은 글자 그대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란 뜻인데 높은 산의 ‘자연석문(石文)’을 지칭한다. 그래서 통천문으로 불리기 전에는 그냥 ‘석문’이라고 불렸다. 이 통천문은 석문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통천문의 멋진 모습을 담기위해 포토존을 찾는데 고맙게도 동쪽에서 햇빛이 비친다. 덕분에 멋진 통천문의 모습을 담았다.


통천문 주변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오던 길의 바위가 예사롭지 않다. 다가서니 바위에 붙은 암석 하나하나가 모두 보석과 같은 형상이다. 필자는 이 바위를 쌀개봉의 ‘보석바위’로 명명(命名)하였다. 아마 이 바위의 모습을 처음 본 사람도 필자이고 이 바위에 대한 형상을 보고 명명한 것도 필자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보석이 왜 육각형인지와 바위가 갈라지면서 육각형으로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아직까지 이곳이 등산로가 아니라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쌀개봉이 개방될 경우 통천문과 함께 보석바위가 계룡산의 또 하나의 명물(名物)이 될 것 같다. 통천문은 예전에는 ‘석문’과 함께 ‘우비(牛鼻)’라고도 불렸으며 인근에 ‘우비암(牛鼻庵)’이 있었다. 통천문의 북쪽에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곳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우비(牛鼻)’라는 지명은 이 바위의 형상이 ‘소의 코에 쇠코뚜레를 단 모습’이라는 데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자세히 보니 영락없이 소의 코뚜레와 같다. 그래서 일명 ‘세코바위’라고도 한다.


쌀개봉의 여러 봉우리를 직진과 우회를 반복하니 땀이 흥건하다. 가장 높은 쌀개봉에 접근하니 20m나 되는 고정로프가 보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곳은 쌀개능선 중 중간이 푹 파였다고 하여 일명 ‘V계곡’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 아닌가. 더구나 시종 오르막길을 쉬지 않고 걸어와 힘이 쭉 빠진 상태에서 좌우의 이런 상황과 직면하니 힘이 더 빠지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어 계룡산신에게 몸을 맡기고 고정로프에 매달릴 수밖에. 쌀개봉 정상의 너럭바위(넓고 평평한 바위)가 심신이 지친 필자를 반긴다. 전망대 겸 휴식장소로 더 할 수 없이 좋은 곳이다. 신원사 아래 양화저수지는 동화 속의 금잉어가 노니는 듯 하고, 찰랑거리는 물은 금빛 물결이다. 쌀개능선에는 막 물들어 가는 단풍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겨울을 기다리는 나무들의 몸부림이다. 산에 왜 오르고, 왜 찾아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쌀개봉의 아름다움이다. 준비해 온 물 한잔을 마시면서 주변 경관을 보니 마음이 흡족하다. 다시 힘을 내어 내려가니 오늘 첫 번째 목적인 계룡산능선의 산성(山城)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다.


계룡산성은 조선왕 기준이 세운 마한국의 유적(?)

 


사실 필자가 계룡산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관심이 많아 이 산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산성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물론 계룡산 능선 곳곳에 돌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것이 산성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중 계룡산 유기(遊記)를 발견하고 번역하면서 일부 유람자의 유기에 계룡산 산성을 언급한 사실을 알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산성을 언급한 대표적인 하나의 유기를 살펴보자.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가서 옛 성첩(城堞, 성의 둘레)을 걸었다. 둘레가 10리쯤 되었는데, 상봉으로부터 구불구불 북쪽으로 뻗어 비로봉(毗盧峯)을 지나 사련봉(四連峯)과 영천봉(靈泉峯)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신원사에 이른다. 승려에게 물으니, 옛날에 조선왕(朝鮮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해 와서 여기 험지(險地)에 웅거(雄據)하다가 나중에 금마(金馬)를 도읍으로 삼고 마한국(馬韓國)을 세웠는데, 고왕암(古王菴)과 마명암(馬鳴菴) 등의 암자는 모두 그 당시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국초(國初)에 짓다가 완성하지 못했다는 세속에 전하는 말은 완전히 잘못이니, 승려의 말이 옳은 듯하다.


성첩에서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내려가 석문(石門)에 이르러 제명하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올라가니, 그곳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서쪽으로 비로봉을 돌아 북쪽으로 정상을 오르니, 바로 신원사의 상류 골짜기로, 이른바 준봉(峯)이었는데, 기이하고 빼어나 볼 만하였다. 북쪽에는 상초암(上草菴)이 있는데, 그 암자는 갑사(岬寺)의 상류 골짜기에 있는 것이다.


(轉而北行。步古城堞。周回可十里餘。自上峯而北。過毗盧峯。由四連,靈泉峯。西至新院。問之僧。則在昔朝鮮王箕準避衛滿亂。據險于此。後都金馬。爲馬韓國。古王,馬鳴等菴。皆其時遺跡云。俗傳國初所築而未訖者決非也。僧言似是。自城堞轉而東下。至石門題名。又轉而北上。此亦神祀處也。西回毗盧峯。北上高頂。卽新院上上洞。而所謂峯亦奇秀可觀。北有上草菴。菴在岬寺上上洞.)

 


위 글은 한천당(寒泉堂) 오재정(吳再挺,1641∼1709)이 1693년 계룡산 산행을 하면서 적은 기행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시 위 글을 풀어보면 계룡산 정상에 성이 있는데 둘레가 10리쯤 된다고 한다. 위치는 상봉(천황봉)으로부터 비로봉(毗盧峯, 쌀개봉)을 지나 사련봉(四連峯, 관음봉과 문필봉)과 영천봉(靈泉峯,연천봉)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신원사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옛날에 조선왕(朝鮮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해 계룡산의 험지(險地)에 웅거(雄據)하다가 나중에 금마(金馬)를 도읍으로 삼고 마한국(馬韓國)을 세웠는데, 고왕암(古王菴)과 마명암(馬鳴菴) 등의 암자는 모두 그 당시의 유적이라는 사실 등이다. 성첩에서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내려가 석문(石門, 통천문)에 이르러 제명하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올라가니, 그곳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사실 등이다. 

 


오재정의 계룡산 산성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의 경치는 비록 볼 것이 부족하지만 형세가 기이하고 험하니 산성(山城)을 쌓을 만하다. 동학사와 갑사에 내외(內外)의 산성을 쌓는다면, 성벽이 높고 험준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 백마산성(白馬山城)과 함께 웅장함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지리(地理)의 이로움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내 흉중에 많은 것을 알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신분이 낮아 나의 포부를 펼칠 수 없다.”


(山之景致。雖不足觀。而勢之奇險。可築山城。洞鶴,岬寺若築內外城。則崇墉峻堞。當與正方,白馬同其雄。若吾可謂能識地利。非其中包得許多。則何能至此。惜乎下焉而不得施也.)
 

*정방산성 : 황해도 사리원 정방산에 있는 산성. 고려 시대에 축조되었으며, 둘레가 12km 정도
 *백마산성 : 평안도 의주에 있는 산성. 고려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쌓았고, 조선 때에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다시 쌓았다. 내성의 둘레는 2590m.


백제 왕자 융에 얽힌 전설, 마명암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당시 산성의 규모나 상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럼 과연 이 산성을 언제 누가 쌓았을까.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 기회로 해당관청에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참고로 이 글을 쓰면서 관련 자료를 조사해보니 충남대학교 박순발교수(고고학과)가 계룡산 능선주변 산성을 조사하여 발표한 논문이 있는데 그는 이 산성을 ‘계룡산성’이라고 명명하고 이 산성이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발표한 사실을 알았다. 아직 해당 논문을 찾아보지 못해 자세히 서술하지 못함을 이해 바란다.


산성은 쌀개능선 끝까지 계속 이어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암벽을 우회하니 널 찍한 공터가 나온다. 여기가 오늘 두 번째 확인하고자 했던 마명암 터인 것 같다. 마명암은 백제의 왕자 융(隆)이 신라군에 포로가 되어 가는 것을 보고 그의 애마(愛馬)가 이 암자에서 ‘슬피 울며 떨어져 죽었다(哀鳴以死)’하여 ‘마명(馬鳴)’이라고 전해오는 곳이다.( 『公州郡誌』(1957), PP. 87­88.)


암자 터는 널찍하고 조용했다. 동쪽에는 깎아지른 듯 칼바위가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이곳이 융의 애마가 떨어죽었다는 바로 그곳인 것 같다. 죽어가는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올라가려니 엄두가 안 난다. 옛 기록인 유기를 살펴보면 계룡산 상봉을 오르려면 마명암에서 하루 밤을 묵고 다음 날 정상을 오르기 위한 숙소로 사용하였는데 과연 그런 장소였다. 


쌀개봉 능선은 명성답게 수려함과 아기자기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산에 오르는 멋은 이런 데에 있지 않나 싶다. 산에 가서 사람이 북적거리면 정말 싫다. 조용하고 아담하고, 혼자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산이라면 어디라도 좋다. 계룡산 내에서 이런 곳이 바로 쌀개능선이다.


하지만 아직 이곳은 우리들 차지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관음봉삼거리에 내려오니 갑자기 확성기에서 소리가 요란하다. 폐쇄된 등산로에 들어간 필자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다. 국립공원측은 아래서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를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계룡산 꼭대기까지 숨을 곳은 없다. 관음봉삼거리는 동학사·갑사·신원사 등지에서 올라 온 등산객으로 시끌벅적하다. 여기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관음봉에 올랐다.


오늘은 계룡산 산성 구경하는 날이니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문필봉 쪽으로 가니 역시 이곳도 산성의 연속이다. 문필봉에 올라 연천봉을 바라보니 그곳까지 이어진 산성이 확연하다. 계룡산을 수백 번 올랐어도 보지 못한 멋진 계룡산성의 모습들이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어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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