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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신도안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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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신도안이어야 하는가
      • 이길구
      • 승인 2016.10.20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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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10>사라져가는 지명

      계룡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신도(新都)안’이다. 그럼 ‘신도안’이란 지명은 어떻게 유래됐을까?


      일반적으로 ‘신도안’하면 계룡산 남쪽아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신도읍지(新都邑地)로 1년간 대궐공사(大闕工事)를 했던 곳이다. 행정부락으로 말하면 지금의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龍洞)·부남(夫南)·석계(石溪)·정장리(丁壯里) 일대이다.


      여기에다 1989년 1월 1일 계룡시 신도안면에 편입된 대덕군 남선리(南仙里)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남선리는 현재의 계룡대 군인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아무튼 ‘신도(新都)안’은 계룡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암용추·숫용추 아래의 지역 일대를 지칭하고 있다.


      ‘신도(新都)안’이란 지명은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행정부락 명칭과 별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많은 전설과 유래가 전해 오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대궐공사 흔적 곳곳에 남아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말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계룡산을 보고서 “중국에 황제(皇帝)가 있는데 어찌해 계룡산을 ‘제도(帝都)’라고 하느냐, 당장 삭제하라”고 명령하자, 제자(帝字)에서 양편 획(劃)을 떼어 신자(辛字)로 고쳐 ‘신도(辛都)’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설득력이 없다.


      이번 기회에 신도안에 대한 지명에 따른 표기방법을 자세히 알아보자. 우선 일반 외부 인사들이 구역 명으로 쓰는 것이 ‘신도내(新都內)’다. ‘신도읍내’ 또는 ‘도국(都局)안쪽’을 지칭한다. 또 일부 종교인들은 과거의 사실보다 새로운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출현할 구원자의 예정적 의미로 ‘신도안(新都案)’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곳 일대가 신흥종교의 총본산이라는 데서 풍자해 썼던 말이다. 이외에도 다른 계룡산 신봉자들은 장래의 지상천국(地上天國), 즉 신정세계(神政世界)의 수도(首都) 예정지라는 의미로 ‘신도안(神道案)’이라고도 불렀다.


      혹자들은 정감록에 나타난 것처럼 ‘정씨(鄭氏)의 도읍지이지 이(李)씨의 新(신) 도읍지가 아니라’해서 ‘신도(新都)안이라고 했다. 신도(新都)는 새 도읍지, 안은 부정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신도(新都)안’에 대해서는 많은 지명표기가 있는데, 대부분 토착민들은 ‘신도내(新都內)’라고 불리기를 희망한다. 수천 년 찬란한 계룡산시대가 열리어 새로운 한국의 중심지가 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신도안은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고 송도(松都)에서 천도(遷都)하려고 한 곳이다. 그 당시 대궐공사 한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는데, 주로 주초석(柱礎石)과 입석(立石) 등이다. 대부분이 부남(夫南)·석계(石溪)·정장리(丁壯里) 일대에 분포되어 있던 것으로 약 120여개나 된다. 주초석은 주로 들 가운데나 나무 인근에 있었는데, 이런 주춧돌을 1983년 620사업으로 토착민이 철수하자 한 곳으로 모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거나 팔기도해 제대로 관리를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신도 건설에 대한 다양한 전설

       


      계룡대에 보관된 주춧돌은 어쩌면 대궐의 토대로 쓰일 뻔 했으나 하륜(河崙) 때문에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다. 벌써 600여 년이 지났으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 할 수 있다. 정감록의 예언대로 계룡산시대가 온다면 이 주춧돌은 빛 볼 날이 있을 것이요, 그때는 과거에 하지 못했던 대궐 터로 쓰일 수 있으리라. 신도건설과 관련한 여러 가지 전설은 지금도 전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신털이봉’ 전설이다. 신도안의 여러 전설 중 ‘신털이봉’전설을 소개한다.


      두마면 신도안에는 도읍지로 알려진 대궐 터가 있다. 이태조가 천도 준비로 일 년 여 역사를 할 때에 수많은 역군들이 일을 하고 쉬면서 신의 흙을 털어 모은 것이 ‘신털이봉’이 되었다. 이태조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송도가 도읍지로서 적당치 않다고 해서 신도안에 도읍을 하려고 많은 백성들을 부역으로 동원했다. 이 부역에 동원된 사람 중에 전라도 정읍에 사는 편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농사를 천직으로 아는 사람이었으나 아내가 천하일색이라는 이유로 관가의 미움을 받아 차출된 것이다.


      그는 집을 떠나올 때 아내에게 “여보! 아무래도 내가 집에 없으면 관인의 출입이 잦을지 누가 아오. 그러니 친정에 가 어머니 곁에 있구려”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세상에 한 번 태어나 죽는 것이 무엇이 두렵습니까? 저는 당신의 아내입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제가 집도 지키고 농사일도 할 테니 염려마세요” 하였다. 그동안 그렇게 유혹이 있어도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던 아내였으므로 안심하고 부역의 대열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신도안에서 주춧돌을 운반하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나 집에 두고 온 아내 걱정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꼭 누구에게 붙들려 갈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도안 공사 중단 명령이 내려 집으로 가 보았지만 아내가 없었다. 그는 아내를 찾기 위해 먹는 것도 잊은 채 수소문하며 다녔다. 그러다가 언덕길 아래에 숯 굽는 집 할머니로부터 아내가 누구한테 쫓기 듯 여기를 지나가면서 남편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고 허둥대며 저 산을 넘어 갔는데, 그 이튿날 새벽에 나졸 두 사람이 찾아와 물어보아 엉뚱한 곳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즉시 신도안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도안에 도착하여 여기 저기 들르면서 아내를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신도안도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신털이봉 아래에 뗏집을 짓고 살면서 아내를 기다리기로 했다. 몇 년이 지나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땅을 파고 곡식을 가꾸기 시작했다. 만일 아내가 돌아오면 여기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30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늙어서 허리가 꼬부라져 갔지만 잊지 못하고 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리다가 그만 여기서 죽고 말았다. 신도안의 신털이봉은 많은 사람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내를 기다리다 죽은 편씨의 맺힌 한이 깃들어 있는 산봉우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외에도 신도건설과 관련한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지금까지 많이 전해지고 있다. 농소리의 산제령 고개에는 태조가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으며, 신도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팥을 갈아 죽을 쑤어 주었다는 ‘팥갈이’가 있다. 팥갈이가 후에 ‘두마(豆磨)’라는 지명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참위적(讖緯的) 예언에서 계룡산은 민중의 희망 속 주인공이었다. 각종 예언서에는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정씨가 나라를 세워 계룡산에 도읍지를 두고 800년간 이어질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고 나라가 불안하거나 정권이 바뀔 때면 민간에 풍미되곤 한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계룡이도설(鷄龍移都說)’도 있었다. 박제형(朴齊炯)의 <조선정감(朝鮮政鑑)>에 의하면, 정씨가 이씨를 대신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할 것이란 이야기가 횡행(橫行)하자, 대원군이 직접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겨 역부(役夫)를 징발해 터를 열고 땅을 팠다고 한다.


      그러나 땅 속에서 석초(石礎)가 다량으로 나오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것은 정씨의 천년지택(千年之宅)인데 이를 범하였으니 큰 화를 입을 것’이라고 소문을 내자, 대원군이 공사를 중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명확한 사실은 아닌 듯하다. 당시 대원군이 새삼스럽게 계룡산에 도읍지를 건설할 이유가 없었으며 그럴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대원군이 신도의 땅을 팠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조선왕조가 망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퍼져 있었고, 이것을 제압하기 위해 직접 신도안의 옛 공사 터를 팠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도안' 옛 지명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해야

       


      사실 계룡산에 대한 왕실의 비상한 관심은 분명했다. 명성황후는 비밀리에 연천봉의 옛 암자터에 ‘압정사(壓鄭寺)’를 세워 정씨의 기를 누르는 ‘기원소’로 삼았다고 하며, 여관(女官)을 보내 연천봉 영천(靈川)에서 몸을 씻고 기원해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고종은 황제 즉위 이듬해인 1898년 계룡신사(鷄龍神祠)의 격을 올려 ‘중악단(中嶽壇)’으로 고치고 중악단이 자리한 신원사(神院寺)를 ‘제국의 신기원을 연다’는 의미로 ‘신원사(新元寺)’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고쳤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천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계룡산의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계룡산을 말하면서 신도안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왠지 ‘신도안’이란 지명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신도안’이란 지명을 더 활용해 ‘고유명사(固有名詞)’ 할 필요성이 있다. 아직까지 ‘계룡시’ ‘계룡대’란 용어보다는 ‘신도안 계룡시’ ‘신도안 계룡대’란 용어가 자연스럽다. 필자는 오래전 이 같은 문제점을 문제 삼아 계룡시당국에 건의 한 바 있다. 이후 다행히도 과거 신도안지역내 면(面)을 ‘남선면’에서 ‘신도안면’으로 변경하는 성과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안면에 있는 각종 학교부터 ‘신도안’이란 지명을 활용해야 한다. 현재 이 지역에는 ‘용남(龍南)초등학교’ ‘용남중학교’ ‘용남고등학교’가 있다. 초창기 지역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작명한 이름들이다. 이것을 ‘신도안초등학교’ ‘신도안중학교’ ‘신도안고등학교’로 변경하면 대한민국 내 어떤 사람들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현재 계룡시나 계룡대 등 옛 신도안 지역과 연관이 있는 기관은 화려한 역사와 문화가 농축된 ‘신도안’이란 멋진 옛 지명을 어떻게 흡수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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