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조선 중기이후 공주가 각광받은 이유
상태바
조선 중기이후 공주가 각광받은 이유
  • 이길구
  • 승인 2016.09.26 18: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5>‘택리지'로 본 계룡산

일반적으로 유산기(遊山記) 작가들의 산에 대한 인식(認識)은 그 당시 시대(時代)·역사(歷史)·사회(社會) 요소들과 개별 작품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유산기라 함은 유명산을 유람하고 적은 기행문을 지칭한다.

 

유산기로 본 산에 대한 개념은 금강산(金剛山)은 빼어난 자연자원 지리산(智異山)과 태백산(太白山)은 신령(神靈)한 우리의 역사 소백(小白)·청량(淸凉)산은 영남 사람들의 이념적 공간으로 수양(修養)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명산(名山)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여 저술(著述)한 학자로 조선 정조(正祖) 때의 실학자(實學者)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산수기(山水記) 서(序) 에 우리나라 명산과 승경(勝景)에 관한 형상(形象)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 책은 전국의 명승지(名勝地)에 대해 설명한 책으로 1책(冊) 66장(章)으로 되어 있으며 경기(京都)·기로(畿路)·해서(海西)·관서(關西)·호중(湖中)·호남(湖南)·영남(嶺南)·관동(關東)·관북(關北) 등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내용을 엮었다. 당시 산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므로 한반도 산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기문(記文)을 통해 대한민국의 네 명산(名山, 백두·한라·지리·금강)을 비교하기를, “백두산은 신령(神靈)하고 그윽하며 한라산은 기이(奇異)하고 괴이(怪異)하며 지리산은 넓고 후덕(厚德)하며 금강산은 아름답고 곱다(白頭之靈邃, 漢之奇怪, 智異之博厚, 金剛之麗)”고 하면서 한반도 명산의 특성을 비교하여 설명했다. 그럼 계룡산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이에 대해 필수적으로 살펴봐야 할 책이 1751년(英祖 27년)에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이다.

 

택리지는 인문 지리지로 내용은 사민(四民)총론, 팔도(八道)총론, 복거(卜居)총론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민총론(總論)’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래 및 사대부의 역할과 사명 및 국가를 구성하는 백성들의 역할에 대해, ‘팔도총론’은 강원도·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황해도·충청도·경기도 등 우리나라 8도 전역의 지리를 논하고, ‘복거총론’은 지리(地理, 지형물길 등), 생리(生利, 경제적 이득), 인심(人心, 좋은 이웃 관계), 산수(山水,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 서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팔도총론(八道總論)’를 통해 우리나라의 인문지리를 설명하면서 “사대부는 어떤 곳에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복거총론’에서 地理(지형, 물길 등) 生利(경제적 이득) 人心(좋은 이웃 관계) 山水(아름다운 경치)의 예를 들면서 정밀(精密)하게 서술하였다. 이는 당시 다른 지리서(地理書)에서 밝히지 않은 획기적인 새로운 내용들이다.

 

그는 이 지리서에서 지세가 좋고 생업이 넉넉하며 인심이 후하며 경치가 빼어난 곳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언급했다. 그럼 ‘팔도총론’에서 가장 살기 좋다고 판단한 곳은 어디였을까? 그가 선택한 최고의 터전은 다른 곳이 아닌 충청도 공주 갑천(甲川) 주변이었다. 공주의 금강(錦江) 언저리를 설명하면서 ‘사송정(금강주변 마을 이름)은 우리 집’이라며 결국 자신의 고향을 최고 살기 좋은 집으로 꼽은 것이다. 이는 당시 공주지역의 중심이었던 계룡산을 지칭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택리지』 공주목(公州牧)에서 계룡산과 그 주변의 산수(山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공주의 동남쪽으로 40里 되는 곳에 계룡산이 있다. 전라도 마이산(馬耳山) 맥(脈)의 끝이며 금강 남쪽에 있다. 산맥의 한 가지가 서쪽으로 내려오다가 크게 끊어져 판치(板峙)가 되고, 다시 솟아나 월성산(月城山)이 되었는데 공주의 진산(鎭山)이다.

 

금강은 동쪽에서 고을 북쪽으로 흘러오다 다시 남쪽으로 굽어져서 熊津(웅진,공주)이 되었다. 또 백마강(白馬江)ㆍ강경강(江景江)이 되었으며, 또 서쪽으로 굽어져 진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공주 동쪽에서 금강 남쪽 언덕을 따라가다가 계룡산 뒤에서 큰 고개를 넘으면 유성 큰 들판이 나서니, 곧 계룡산의 동북방이다.

 

계룡산 남쪽 마을은 조선 건국 초기에 도읍으로 정하려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이 골짜기 물이 온 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면서 진산(珍山)ㆍ옥계(玉溪)의 물과 합치고, 북쪽으로 금강에 흘러드는데 이 냇물 이름이 갑천(甲川)이다. 냇물 동쪽은 회덕현(懷德縣)이고, 서쪽은 유성촌(儒城村)과 진잠현(鎭岑縣)이다.

 

동서 양쪽의 산이 남쪽으로 들판을 감싸 안으며 북쪽에 와서는 서로 교차되어 사방을 고리처럼 둘러막았다. 들 가운데는 평평한 둔덕이 구불구불하게 뻗었고, 산기슭이 깨끗하고 빼어나다. 구봉산(九峯山)과 보문산(寶文山)은 남쪽에 불끈 솟아 맑고 밝은 기상이 한양 동교(東郊)보다 나은 듯하다. 전지(田地)가 아주 좋고 넓으나, 바다가 조금 멀어 서쪽으로 강경의 교역에 힘입는데 강경까지는 불과 100里이다. 계룡산의 서남방에 있는 네 고을은 모두 큰 들 가운데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강경 나루가 한계이고, 북쪽으로는 공주와 경계가 닿아 있다. 계룡산 넷째 연봉(連峯)에서 한 가지가 서쪽으로 내려와 경천촌(敬天村)이 되었는데 판치(板峙)의 남쪽에 있다. 땅이 기름지고 산이 웅장하며 백성이 부유하고 물자가 풍부하다.

 

동쪽은 공주 대장촌(大庄村)이고, 서쪽은 尼山ㆍ石城 두 고을이며, 남쪽은 連山ㆍ恩津 두 고을이다. 尼山과 連山은 산이 가깝지만 땅이 기름지고, 恩津ㆍ石城은 들에 위치하였으나 땅이 메말라 수재와 한재를 자주 당한다. 이 네 고을은 敬天村과 통하여 한 들로 되었으며, 바다 조수가 江景을 지나 드나들므로, 들 가운데 여러 냇물과 골짜기에 배가 통행하는 이익이 있다.”

 

(州東南四十里爲鷄龍山. 卽全羅馬耳之盡脈也, 在錦江南山一枝西下. 大斷爲板峙, 起而爲月城山, 爲州之鎭山. 錦水自東至州北, 南折而爲熊津. 爲白馬江爲江景江, 又西折而爲鎭江, 入于海. 自州東循江南岸, 鷄龍背後踰重嶺, 爲儒城大野, 卽鷄龍艮維也. 鷄龍南洞, 國初欲都而未果. 是洞之水一野之中, 自西流東, 與珍山玉溪合, 北入錦江, 名曰甲川. 川東卽懷德縣, 西卽儒城村及鎭岺縣也. 東西兩山自南抱野, 至北合乂, 高障四山, 而環圍野中, 平岡委蛇, 嫩麓精秀. 九峯山與寶文山聳峙於南, 淸明氣像殆過漢陽東郊. 田地極善且廣, 但海汀稍遠, 西仰江景之輸易, 然江景不滿百里. 鷄龍坤維有四邑, 皆在大野中, 西限江景津, 北與公州接. 鷄龍四連峯一枝西下, 爲敬天村, 在板峙南. 土沃山雄, 民物富盛. 東則公州大庄村, 西則尼山石城二縣, 又南則連山恩津二縣也. 尼連近山土沃, 恩石處野土薄, 數被水旱之災. 此四邑與敬天通爲一野, 海潮從江景出入, 野中諸川谷通舟船之利.)

 

公州, 계룡산과 금강이 만나는 대길지(大吉地)

 

이 내용을 보면 당시 계룡산인근과 공주주변을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금강을 끼고 있는 주변의 산수를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조목조목 적시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보면 산과 강이 어우러져 만나는 곳을 최고의 길지(吉地)로 여기는데 바로 계룡산과 금강이 만나는 곳이 대(大)길지라는 것이다.

 

계룡산의 아름다움, 거기에 담겨있는 신령스런 분위기를 묘사한 글들은 수없이 많이 있는데  『택리지』 의 다른 곳에 서술된 계룡산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산 모양은 반드시 수려한 바위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또한 맑다. 또 반드시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큰 힘이 있다. 이와 같은 곳은 우리나라에 4곳이 있으니 개성(開城)의 오관산(五冠山), 진잠(鎭岑)의 계룡산(鷄龍山), 한양(漢陽)의 삼각산(三角山), 문화(文化)의 구월산(九月山)이다.

 

<중략> 계룡산은 웅장(雄壯)한 것이 오관산보다 못하고, 수려함은 삼각산보다 못하다. 전면에 또 수량(水量)이 부족하고, 다만 금강 한 줄기가 산을 둘러 돌았을 뿐이다. 무릇 회룡고조(回龍顧祖)라는 산세는 본디 힘이 적다. 그러므로 中國 금릉(金陵)을 보더라도 매양 한편의 패자(覇者) 노릇하는 고장으로 되었을 뿐이다.

 

<중략> 계룡산 남쪽 골은 한양과 개성에 견주어서 기세가 훨씬 떨어진다. 또 판국 안에 평지가 적고 동남쪽이 넓게 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맥(內脈)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精氣)를 함축하였다. 판국 안 서북쪽에 있는 용연(龍淵)은 매우 깊고 또 크다. 그 물이 넘쳐서 큰 시내가 되었는데 이것은 개성과 한양에도 없는 것이다. 산 남쪽과 북쪽에 아름다운 시내와 바위가 많다. 동쪽에는 봉림사(鳳林寺)가, 북쪽에는 갑사(甲寺)와 동학사(東鶴寺)의 빼어난 경치가 있다.”

 

(凡山形必秀石作峯, 山方秀而水亦淸. 又必結作於江海交會之處, 斯爲大力量. 如此者國中有四, 一則開城五冠, 一則漢陽三角, 一則鎭岺鷄龍, 一則文化九月也. <中略> 鷄龍則雄不及五冠, 秀不及三角, 前面又少朝水, 只錦江一帶周廻龍身而已. 凡回龍顧祖之地, 本少力量. 故雖以金陵觀之, 每爲偏覇之邦. <中略> 鷄龍南洞, 比漢陽開城氣勢逈遜. 又局中平地少, 而東南又不敞豁. 然其來旣遠, 而洞府深蓄. 局內西北有龍淵, 極深且大. 溢爲局中大溪, 此則開城漢陽所無也. 山南北亦多好泉石. 東有鳳林, 北有甲寺及東鶴寺之奇勝.)

 

이중환은 이처럼 계룡산을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보다 국도(國都)로는 다소 떨어진다고 적고 있지만 내맥이 멀고 골이 깊어 정기를 함축하고 있고 용연(용추)이 매우 깊고 커서 그 물이 넘쳐서 큰 시내를 이뤘다고 강조하였다. 한 마디로 계룡산은 산의 규모나 수량은 다른 유명(有名)산보다 다소 처진다고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신비감(神秘感)이나 매력(魅力)은 최고라고 평가한 것이다.

 

특히 계룡산의 산세를 ‘회룡고조(回龍顧祖)’로 표현했는데 이는 계룡산줄기가 마이산에서 분기(分岐), 북으로 거슬러 올라와 공주 동쪽에서 역(逆) C자형으로 우회하고 있는데, 이것이 ‘조상(祖上)을 돌아보는 형세와 같다’ 하여 ‘회룡고조’, 혹은 ‘산태극’이라 불리는 것을 말한다. 회룡고조와 산태극수태극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지도를 그려가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아무튼 계룡산 주변이 다 예사롭지 않는데 조선 초에는 신도안이, 조선중기 이후에는 금강과 계룡산이 연계된 공주주변이 각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세월은 흘러 지금은 어떠한가? 계룡산 주변이 대한민국 변화의 중심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는가. 이는 서막(序幕)에 불과하다. 내년 대통령선거가 되면 왜 계룡산이 한반도의 중심이 되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서 다음번에는 ‘계룡산과 정감록’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자 한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