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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름으로 불린 계룡산…백제에선 '계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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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름으로 불린 계룡산…백제에선 '계람산'
  • 이길구
  • 승인 2016.09.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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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4>계룡산과 계룡산국립공원

계룡산. 그리고 계룡산국립공원. 이 두 명제(命題)는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를까? 분명히 다른 이 용어를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구분하지 않으려는 이상한 심리를 갖고 있다. 아니 관심조차 없다. 그냥 아무 개념 없이 '계룡산국립공원=계룡산'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계룡산국립공원을 계룡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려는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할 뿐이다.

 

먼저 계룡산국립공원에 대해 알아보자. 대한민국은 지난 1967년부터 전국의 명승지(名勝地)를 보존하기 위해 국립공원을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국가에서 보존하다는 의미에서 국립이며, 도(道)단위에서 지정하는 공원은 당연히 도립공원이다. 이외에도 일선 시군에서 지정하는 자연공원이라는 것도 있다.

 

따라서 계룡산국립공원은 기존의 계룡산에 속하는 산줄기를 인위적으로 획정한 정부차원에서 보존, 관리하는 면적에 불과하다. 계룡산국립공원의 총면적은 65㎢. 1968년 12월 31일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첫 번째는 지리산으로 1967년 12월에 지정됐으며 총면적은 440㎢로 계룡산에 비해 7배나 넓다. 참고로 내후년(2018년)이 되면 계룡산 국립공원 지정 50년이 된다. 따라서 계룡산으로 명명된 것은 적어도 1000년이 넘는 것에 반해 국립공원이 된 것은 정확히 48년째이다. 

 

그럼 계룡산은 무엇이며 계룡산의 범위와 한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 까? 필자는 이에 대해 계룡산을 일단 광의(廣義)의 개념과 협의(狹義)의 개념으로 구분해 본다. 광의의 계룡산은 역사적으로 볼 때 계룡산이 처음 불려 질 때의 계룡산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계룡산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지금의 계룡산국립공원이 아니라 예전부터 불리던 계룡산 전체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협의의 계룡산은 지금의 계룡산국립공원을 지칭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필자가 왜 생뚱맞게 계룡산과 계룡산국립공원을 구분하여 따지려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계룡산국립공원은 원래의 계룡산에 비해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강조)시켜 주려는 것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지금의 계룡산국립공원은 예전의 계룡산에 비해 절반도 채 안된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계룡산국립공원은 기존의 계룡산에 속하는 산줄기 일부를 인위적으로 획정한 정부차원에서 보존, 관리하는 것이지 계룡산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앞의 조선시대 계룡산 전도(全圖)를 보자. 이 지도는 계룡산을 설명하고 있지만 지금의 동학사, 갑사, 신원사 중심이 아닌 신도안을 중심으로 계룡산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예전(조선시대)에는 모든 계룡산의 중심이 신도안에서 시작해서 신도안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 그림 외에도 이 같은 사실을 기록한 역사기록이나 지리서는 많다.

 

또 필자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옛 선인들의 기록인 계룡산 유기(遊記)를 보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많다. 다만 자료가 빈약한 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규명할 수 는 없다. 필자가 계룡산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하고 있지만 이 분야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시대에 따라 변화된 계룡산의 변천된 과정을 아래에서 짚어보고 세부적인 것은 천천히 규명해보자 한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의 국립공원만 염두에 두고 계룡산을 생각한다면 1968년 이전의 계룡산을 설명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위 <신동국여지승람>은 이같은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중 하나이다. 계룡산의 위치가 공주지역이 아닌 황등야산(黃等也山) 즉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논산, 계룡시)에 속해 있으며 목록의 권(卷)에는 연산현(連山縣)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지리서에는 계룡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계룡산은 연산현 북쪽 27리에 있다. 태조가 처음 즉위했을 때 이 계룡산 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吉地)를 택하여 대략 그 기지를 정하고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운(漕運)의 길이 멀다하여 이를 그만 두었는데 지금까지도 그곳을 신도(新都)라 부르고 있으며 당시 구획했던 개울과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기록에 나타난 鷄龍山은?

 

그럼 계룡산이란 산명(山名)은 언제부터 불렸고 지역적으로 어디까지를 지칭했을까? 지극히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계룡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우리의 기록이 아닌 중국 당대(唐代) 장초금(張楚金)이 지은 <한원(翰苑)>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괄지지(括地志)’ 부분에 국(백제)동유계람산(國東有鷄籃山)(백제의 동쪽에 계람산이 있다)라고 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제시대에는 계산(鷄山), 계람산(鷄籃山)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계람산은 ‘계곡물이 쪽빛처럼 푸르다’는 의미이다. 삼국 이전의 삼한(三韓)시대에는 천태산(天台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계룡산이 백제시대 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에 의해서다. 당시 백제는 한강유역의 도성이 유린당하고, 개로왕(蓋鹵王)이 참살 당한 이후 즉위한 문주왕(文周王)이 수도를 웅진(熊津. 현 공주)으로 옮겼다. 이는 동남쪽 지척에 있는 계룡의 웅악(雄嶽)을 방어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금의 계룡산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찾기에는 사료적 가치가 충분하지 않다. 본격적으로 계룡산이 유명세를 떨친 것은 통일신라시기부터이다. 

 

고려 때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잡지(雜志) 제사조(祭祀條)를 보면 계룡산의 당시 위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계룡산을 ‘서악(西岳)’으로 지칭했다. 다시 말해 당시 통일신라의 수도인 경주(慶州)에서 바라보면 서쪽의 산중 제일 명산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는 9州의 지방조직이 편성된 신문왕대(神文王代)로 여겨지는데 이후부터 주로 계룡산이라 불렸던 것 같다.

 

신문왕대 제사 규정에 의하면 국가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된다. 대사는 수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3곳이며, 중사는 계룡산이 포함된 오악(五岳)을 위시하여 사진(四鎭), 사해(四海), 사독(四瀆, 瀆은 작은 내의 물을 합쳐 바다로 흐르는 강을 말함)이었으며, 소사에는 24개의 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 산을 지역별로 옹산(翁山), 서악(西岳), 중악(中岳). 계악(鷄岳), 계립(鷄立), 마목현(麻木峴), 마골산(麻骨山), 마곡산(麻穀山), 구룡산(九龍山), 용산(龍山), 화채산(火彩山), 화산(火山)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구룡산은 연이은 봉우리가 아홉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데 연유하였고, 용산은 사방에 계곡과 용추(龍湫)가 있다 해서, 화산 또는 화채산은 산세가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 하여 불렸던 것이다. 지금의 계룡산 형세를 살펴보면 충분히 불릴 수 있는 산명(山名)들이다.

 

신라 서악(西岳), 고려 남악(南嶽), 조선 중악(中嶽)

 

고려 때의 계룡산 기록은 <대동지지(大東地誌)>(조선 철종 14년·1863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지리서를 보면 계룡산단(鷄龍山壇)에‘신라의 서악(西岳)으로서 중사(中祀)에 올랐고, 고려에서는 남악(南嶽)으로서 중사(中祀)에 올랐다. 조선에서도 명산(名山)으로서 소사(小祀)에 올랐다. (鷄龍山壇 : 新羅以西岳載中祀, 高麗以南岳載中祀, 本朝以名山載小祀)’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도 역시 중사(中祀)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보면 남쪽의 명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산에 대한 본격적인 제사는 조선시대에 태종(太宗)때부터 시작되어 세종(世宗)에 이르러 매년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이로 볼 때 계룡산 신에 대한 국가적인 제사는 고대 이래로 일정한 장소에서 정해진 규례에 따라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초기부터 계룡산 제사는 계룡산사(鷄龍山祠)에서 치러졌다.

 

조선조 후기의 공주목읍지(公州牧邑誌) 기록을 보면 ‘계룡산사는 재부남사십리(在府南四十里)’라 하여 위치가 ‘공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철종(哲宗) 10년(1859)의 <공산지(公山誌)>에는 계룡산사가 ‘계룡단(鷄龍壇)’ 또는 ‘계룡산단(鷄龍山檀)’이란 명칭으로 변하였다.

 

계룡산 내 신원사의 오늘날 표기는‘新元寺’지만 본래 이름은‘神院寺’이다. ‘神院’이라는 명칭은 바로 ‘제사처’ 또는‘성소(聖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계룡산사가 고대 이래로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원사 경내의 중악단(中嶽壇)의 ‘중악’이란 명칭도 조선시대 철종 이전에 묘향산〔북악(北岳), 상악(上嶽)〕, 지리산〔남악(南岳), 하악(下嶽)〕과 함께 계룡산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중악단은 계룡산사에 대한 조선조 후기의 별칭(別稱)이었던 셈이다. 계룡산사(鷄龍山祀)가 공식적으로 중악단으로 개칭된 시기는 <공주군지(公州郡誌)>에 “고종기묘(高宗己卯)”라 하여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배려로 월주화상(月珠和尙)이 폐허가 되어가는 건물을 재건한 때로 보인다.

 

기록에 보이는 계룡산은 아직까지 많이 발굴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계룡산은 배달민족의 영산(靈山)으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신성시되는 산임에는 분명하다. 계룡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료발굴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이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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