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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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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 이길구
  • 승인 2016.09.1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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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3>태산과 계룡산

필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유교문화권지역을 답사한 바 있다. 주 대상지역은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지역이다. 잘 알다시피 이곳은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도성이었으며, 세계 4대 성인(聖人) 가운데 한 명인 공자(孔子)가 태어난 곳이다. 도시 규모는 작지만 2000년 전 역사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의 묘와 그 자손의 묘가 모여 있는 공림(孔林), 맹자(孟子)와 관련된 명소인 맹묘(孟廟)·맹림(孟林)·맹부(孟府)의 삼맹(三孟) 등 관련 유적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중국 오악(五嶽)중 가장 신성시 되는 태산

 

필자는 중국의 유교문화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실은 인근의 태산(泰山)에 꼭 가보고 싶었다. 내가 왜 태산에 관심을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영향이 크다. 고등학교 때 읽은 그가 쓴 한편의 시는 다음과 같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필자는 이 시를 지금도 외고 있다. 중국 산동성 중부에 위치한 태산은 중국 오악(五嶽)가운데 첫 번째 꼽히는 명산중의 명산이다. 역대 황제 즉위 시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封禪)의식이 행해졌던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태산은 웅장한 산 곳곳에 명승고적이 흩어져 있고 이 같은 고적이 산 아래에 있기 보다는 산중턱과 정상에 있다는 것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평일임에도 불구 관광객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산 곳곳의 암자·바위·절 등은 그 자체가 신성한 것들이어서 단순한 산행이 아닌 소원을 비는 기도처였다. 주봉인 옥황봉(玉皇峯)은 1532미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태산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 산동성 북쪽에 있는 태산산맥(泰山山脈)의 주봉으로 태산과 함께 동악(東岳, 秦代), 태중산(泰中山), 태악(泰岳) 등으로 불리다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옥황산(玉皇山)으로 명칭이 개명됐다가 지금은 정상을 옥황정(玉皇頂)으로 불리고 있다. 예로부터 중국 국민의 숭배 및 신앙의 대상으로 역대 왕조의 국가적 행사 가운데 가장 장엄한 의식인 봉선(封禪, 왕조의 번영을 하늘과 땅에 고하는 의식)이 행해졌으며 지금도 추수감사제, 홍수, 지진 때 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적 개념이 아니라 도가(道家)와 결합된 광범위한 민간 신앙의 본산으로 양(陽) 원리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한반도 중악(中嶽)인 이곳, 영산(靈山) 계룡산

 

그럼 배달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계룡산(鷄龍山)은 어떠한가. 주지하다시피 계룡산은 풍수·도참설에 의한 국도 예언지이며 신흥종교(민속자료) 역사의 보고(寶庫)이다. 또한 식물·동물 등 생태계의 종합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계룡산 정상인 천황봉(天皇峯)이 국가에서 관리해왔던 제사 처였다는 사실이다.

 

명산으로 널리 알려진 계룡산은 백제시대 웅진(熊津)이었던 시기에 수도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계룡산이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백제시대 공주로 남천(南遷) 이후 계룡산 주변에 왕도(王都)가 들어서게 되면서부터이다. 신라통일 이후 계룡산은 중사(中祀)에 속했다. 국가제사는 삼국통일 이전부터 내려오던 산악신앙(山嶽信仰)을 근거로 민심 안정을 위한 국가차원의 정치적인 조직화라 할 수 있다. <대동지지(大東地誌)>(조선 철종 14년·1863년)에 의하면 계룡산단(鷄龍山壇)에 ‘신라의 서악(西岳)으로서 중사(中祀)에 올랐고, 고려에서는 남악(南嶽)으로서 중사(中祀)에 올랐다. 조선에서도 명산으로서 소사(小祀)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新羅以西岳載中祀, 高麗以南岳載中祀, 本朝以名山載小祀)

 

조선시대에 들어 국가적인 제사는 태종(太宗)때부터 본격화되었으며 세종(世宗)에 이르러 매년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이로 볼 때 계룡산 신에 대한 국가적인 제사는 고대 이래로 일정한 장소에서 정해진 규례에 따라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원사의 오늘날 표기는 ‘신원사(新元寺)’지만 본래 이름은 ‘神院寺(신원사)’이다. ‘신원(神院)’이라는 명칭은 바로 ‘제사 처’ 또는 ‘성소(聖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계룡산사가 고대 이래로 여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악단(中嶽壇)의 ‘중악(中嶽)’이란 명칭도 조선시대 철종(哲宗) 이전에 묘향산〔北岳〕, 지리산〔南岳〕과 함께 계룡산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후 고종은 황제의 제위에 즉위하자 다음 해 계룡신사를 폐하고 천자오악(天子五嶽) 봉선의 옛 뜻에 따라 이를 ‘중악단’으로 고쳤다고 한다. 계룡산 중악단의 현판은 1891년에 직지어사(直指御史) 이중하(李重夏)가 쓴 것으로 되어 있으며, 1892년에 쓰여 진 현판등문에서 ‘우리나라의 중악인 이곳’이란 표현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중악단은 계룡산사에 대한 조선조 후기의 별칭(別稱)이었던 셈이다. 현재 중악단은 삼악(三嶽)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서의 의미가 크다.

태산과 계룡산은 신령스런 정신적인 산

 

이렇게 중국의 태산과 한국의 계룡산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인 많다. 태산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제천의식을 행했던 중국 고대문명과 신앙의 상징이다. 이는 우리의 계룡산이 국가의 제사처이자, 민속신앙의 메카인 것과 너무 흡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령스럽고 정신적인 위안을 지닌 영산으로 양 국민이 태어나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산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난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중국의 태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산은 중국의 동악(東嶽)으로 우리의 계룡산처럼 중국 국민의 숭배 및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은 세계적 관광지로 부상했다. 매년 관광객이 7백만 명, 관광수입은 6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계룡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문화유산정비 복원계획 수립, 추진전략작성(유산성격 설정), 가능성 모색(CUV·진정성·완전성), 보호 및 관리 실적(계획), 지역주민 협조, 기반개선 여건 조성(역사도시 만들기), 조사연구(우월성 강조 측면) 등의 노력을 거쳐 국내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모니터링을 거친 다음 신청해야 한다.

 

얼마 전 계룡산 주변의 백제 역사도시(歷史都市)가 문화유산 등재가 확정된 사실은 우리에게 계룡산도 충분히 가능성이 열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도안 주변의 역사현장과 자연환경,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자료의 수집과 정리, 활용을 통한 체계적 접근이 절실히 요망되는 시점이다. 특히 옛 기록인 계룡산관련 유기를 잘 활용한다면 많은 보탬이 될 것은 분명하다.

 

충청남도와 국립공원 측은 이번 공주·부여지역의 문화유적(文化遺蹟)에 대한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 확정을 계기로 추진위를 구성하고 전문가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계룡산이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산이 갖고 있는 자연적 환경과 역사성, 각종 기록물과 문화유적, 금석문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천혜의 환경과 유교와 불교 관련 문화재 및 기록물은 물론 토착종교와 민간신앙 등의 자료·건축물·상징물·기록물이 계룡산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생성(生成)되고 전래(傳來)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요한 문화유적, 천혜의 자연환경, 그리고 독창적 신흥종교의 발흥지로서 충분한 자격요건을 갖추고 있는 계룡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꼭 필요하다 하겠다. 특히 2020년 세계군문화축전이 계룡시 신도안 일원에 확정됨에 따라 행사 기간 전에 계룡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 7월19일 공주대학교에서는 ‘계룡산, 세계문화유산으로의 가능성’ 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필자는 ‘계룡산 아카이브 구축의 필요성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였다. 우리의 계룡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다. 앞으로 충청인들이 뜻을 모아 세계적 명산이자 영산인 계룡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물론 필자도 앞장서 노력할 것이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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