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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사망, 바스티유감옥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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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사망, 바스티유감옥 함락
  • 세종포스트
  • 승인 2016.07.1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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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 7월 14일



○…1789년 - 프랑스 혁명, 바스티유 감옥 함락


바스티유 감옥은 원래 백년전쟁 당시 파리 동부 외곽과 오뗄상폴 궁전을 방어하기 위해 요새로 건축됐다. 프랑스의 샤를 5세가 성 안토니 관문으로 건설한 이 건축물은 1370~1383년에 성채가 증축되어 요새의 기능을 담당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군중들은 불길한 소문에 휩싸여 폭동을 일으켰고, 총으로 무장한 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흔히 잘못 아는 상식과는 달리, 습격 당시 바스티유에는 7명의 죄를 지은 자들만이 있을 뿐이었고, 양심수는 없었다. 습격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교도소 주둔군의 지휘자였던 베르나르-레네 드 뢰네(프랑스어: Bernard-Ren de Launay)는 대부분 늙고 병약했던 휘하의 부하 80여 명과 함께 1000여 명의 무장한 군중을 상대로 저항했으나, 결국 바스티유는 함락됐고 뢰네는 살해당했다.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시민 들은 베르나르-레네 드 뢰네와 파리 시장인 플레제이유의 머리를 창에 꽂고 파리 시내를 누비는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바스티유 습격은 정부군과 민중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됐고, 결국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발단이 됐다.


○…1907년 - 이준 열사 사망(1859년 1월 21일~1907년 7월 14일)


1907년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해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했다.

이준은 1907년 7월 14일 헤이그의 숙소에서 사망했다.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살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살설이 떠돈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문교부장관의 요청에 따른 조사 결과,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년 ‘할복 자살이 아닌 쪽’으로 판단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됐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건립돼 있다.


○…1933년 - 독일에서 나치당을 제외한 정당이 법으로 금지


○…1958년 - 이라크 왕국 해체


○…2000년 - 추풍령 고속도로 연쇄 추돌 참사


○…2008년 - 일본, 중학교 사회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


○…2010년 -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 평균 기온이 기상 관측 역사상 최고를 기록


○…2011년 - 서울 남산1호터널에서 택시 폭발사고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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