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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발터 벤야민의 유년시절과 짧은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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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발터 벤야민의 유년시절과 짧은 기억들
  • 서경홍
  • 승인 2016.06.16 13: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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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자전거 유럽 여행 [3]


“아마도 어떠한 일에도 무력함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일에서 결코 장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에 수긍한다면 그러한 무력함이 처음에, 혹은 노력을 시작하기 이전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의 와중에 생긴다는 점 또한 이해할 것이다.”


베를린에서도 돌아와 그곳에 대한 회상과 기록을 시도하면서도 발터 벤야민의 이 말처럼 무력감이 밀려왔다. 베를린에 대한 기억을 서사로 옮기는 일이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연구소 화분에 물을 주고, 죽은 잎을 뜯어내고,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책장 먼지를 훔치고.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할 수 없이 벤야민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고향인 베를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고.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 것으로 통찰”하는 것이라고 그가 답했다. 개인의 경험을 사회적 필연으로 통찰하라. 그 말을 듣고 며칠 만에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여행루트를 정하면서 모든 구간을 자전거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의 거리가 550km 정도인데, 그곳까지는 우선 기차로 점프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도 베를린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 유레일패스를 끊었는데 시행착오였다. 독일의 기차종류는 ICE, IC, RE, RB가 있는데 ICE와 IC는 대도시 간 장거리를 직행하는 고속열차이고, 나머지는 소도시를 이어주는 완행열차이다.


불행히도 모든 기차를 탈 수 있는 유레일패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열차에는 자전거를 실을 수 없어 완행열차를 타야만 했다. 프랑크푸르트 역에서 12시에 출발한 기차는 카셀, 빌헬름스회에, 장어하우젠, 그리고 막데부르크에서 네 번 환승을 했다.


환승할 때마다 짐을 실은 무거운 자전거를 기차에 올리고 내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기차 안에서 만난 폴커가 도와주었다. 그는 전기기사로 일하다 퇴직한 연금생활자였다. 날씨가 좋은 봄부터 여름까지 아내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한다며 이번엔 모젤 강가를 투어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평화롭고 유유자적 모습이었다. 자전거 여행경로에 대한 정보를 여러 가지 알려주었고 나중에 연락하자며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고 막데부르크에서 헤어졌다.


밤 10시 30분쯤이 되어서야 베를린에 도착하였다. 베를린으로 가는 길은 멀었고, 쉽지 않았다.


중앙역 근처의 한 호스텔에서 밤을 보내고 눈을 뜬 시각은 이른 새벽이었다. 베를린은 한 마디로 도시 자체가 근대 이후의 독일 역사박물관이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거점이었으며 비스마르크가 통일한 독일제국의 수도였고, 히틀러의 정치무대였다.


2차 대전의 패전과 함께 독일전체가 점령국에 의해 네 개로 분할되었듯이 베를린도 같은 운명을 거치면서 반쪽짜리 수도의 지위를 겨우 지키며 20세기 냉전의 상징도시였다. 베를린 장벽이 겹겹이 도시를 갈라놓았고, 그 장벽이 허물어짐과 함께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낸 곳이다.


베를린이 차지하는 중요함과 상징성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불가능하다. 그러한 역사적 중압감 때문에 베를린을 찾은 내 마음은 여행의 즐거움보다 역사의 영광과 오욕의 명암이 교차하는 가운데 의연하게 서 있는 베를린의 분위기에 숙연해졌다. 베를린은 하나하나의 개인사가 사회적 필연으로 결합되어 그 역사를 만들어냈다.


 

역 바로 앞에 있는 슈프레 강을 건너면 너른 평지에 커다란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는데, 바로 ‘라익스탁스게보이데’라는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1894년 건축가 파울 발로트가 설계하여 완공한 이 건물은 독일제국과 바이바르 공화국의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1933년에 아직도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원인으로 불타버렸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틀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후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많은 부분이 파손된 채 오랫동안 흉물로 방치되기도 하였다. 독일의 재통일 이후인 1999년부터 다시 독일 의회민주주의의 본산이 되었다.


국회의사당이란 중요한 건물이라지만 여의도에 있는 우리의 그것처럼 쇠울타리도 경비병도 없다. 바로 근처에 있는 총리 관저도 마찬가지다. 우리식으로 해석하면 독일인들은 안보의 무방비 상태 아니면 안보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다.


건물의 중앙 합각머리 벽면에 “독일 국민에게”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을 독일국민에게 바친다는 헌정사이다. 파울 발로트는 이 문구로 의사당을 독일국민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그 의미가 당시 황제인 빌헬름 2세의 심기를 건드려 20년 동안 성사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민심이 황제를 이반하게 되자 국민들의 신임과 지지를 얻기 위해 이 문구의 각인을 허용했다고 한다.



 
독일 국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볼프강 티어제이다. 그는 사민당(SPD) 출신의 정치인으로 1998년부터 2013년까지 국회의장과 부의장 맡았다. 널찍한 이마에 덥수룩한 수염의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의 그는 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의장 관사를 마다하고 오래전부터 살던 월세집에서 출퇴근하였다. 우리가 자주 듣는 국회의원의 특권이란 말은 아마도 독일의 정치에는 아예 없거나 쓸 일이 없는 말일 것이다.


국회가 열리면 본회의실을 꽉 채운 의원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진지한 토론을 하고 날카로운 논쟁을 벌인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권위주의, 관료주의, 이기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국회의원이라는 말의 독일어 ‘Abgeordnte’는 전권을 위임받아 파견된 사람이란 뜻이다. 이는 말 그대로 위임받은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토론의 장이 바로 국회의사당이며, 그러한 활동을 의회민주주의의 정신에 맞게 수행하는 공간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때론 좌파 시인이자 가수인 볼프 비어만이 베를린 장벽붕괴 25주년을 기념하여 대회의장 연단에서 재치와 풍자, 반어와 시니컬한 발언을 하고 노래와 기타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할 때 국회의원들은 웃고 박수를 치며 그 공연을 모두 함께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역사의 단절이 아닌, 연속성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이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의사당 건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한국에서 왔으며 지금 여기는 독일의 베를린이라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하나의 의식(儀式)처럼 자전거를 타고 의사당 주위를 몇 바퀴 돌았다. 마치 탑돌이라도 하듯 했지만 무엇을 소망하고 빌어야할지 몰랐다. 나와 가족들의 안녕과 행복, 그것이 아닌 건만은 분명했다.


멀리 희미하고 아련하게 있는, 그러나 잡을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했던가. 그것에 이끌려 마지막 바퀴를 돌자 원심력을 잃은 채 궤도 밖으로 이탈하는 행성처럼 나의 자전거는 국회의사당 둘레를 벗어나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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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n 2016-06-05 18:16:52
3호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독일국회에서 기타치며 공연하는 시인 볼프 비어만과 빨간 머플러에 자전거타고 출퇴근하는 독일 국회의원이 매우 인상적이고 멋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회는 언제나 저렇게 될런지...다음 글을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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