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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그들이 ‘불행했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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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그들이 ‘불행했던 천국’
  • 이석원
  • 승인 2016.07.15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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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뿐 숨으로 유럽을 걷다 3 | 오스트리아 빈




시내를 살짝 벗어난 넓은 공원은 평일의 한적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깅을 하는 젊은 여성, 유모차를 끌고 나와 산책하는 엄마, 사이좋게 지팡이 하나씩을 짚고 나머지 한 손은 서로 꼭 쥐고 벤치에 앉아 있는 노부부.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도 않고, 대단히 아름다운 풍광도 아니지만 공원은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 중심가 캐른트너 거리 부근 슈테판플라츠 역에서 지하철 우반 3호선(U-Bahn 3)을 타고 지메링(Zimmering) 역에서 내려 다시 6번 트램을 타면 도착하는 곳 빈 시립중앙묘지. 유럽 좀 다녀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곳을 빈(Wien) 인구보다 많은 500만기의 무덤이 있는 묘지라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문에서 100여m 들어가면 왼쪽에 32-A 구역이 나오는데 ‘MUSIKER’라는 팻말과 함께 음악가들의 묘역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인류의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지만 가장 불행했을지도 모를 3명의 묘가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루드비히 반 베토벤, 그리고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다.


천재 모차르트는 죽음이 ‘불행’했고, ‘악성(樂聖)’ 베토벤은 전성기가 ‘불행’했으며, ‘클래식 음악의 완성자’ 슈베르트는 삶 자체가 ‘불행’했다. 이들 세 명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논한 수 없는 곳이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음악의 수도 빈(Wien)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바로 이 빈에서 ‘행복’과 ‘영광’ 보다는 ‘불행’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빈에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이는 모차르트다. 찰츠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였지만 1781년 25살에 빈으로 온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빈에서 살았다. 빈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성 슈테판 성당은 모차르트가 결혼과 장례식을 치른 곳이고, 캐른트너 거리 입구의 국립 오페라극장은 모차르트 사후 78년 후에 세워진 곳이긴 하지만 개막작으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한 이후 언제나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연주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궁이었던 호프부르크 궁전 내 예배당에서 모차르트는 빈 소년 합창단을 지휘했고, 여름 별궁인 쇤부른 궁전에서 6살의 모차르트는 당시 유럽의 지배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신비로운 피아노 연주를 했고, 그녀의 막내 공주인 마리아 안토니아, 우리가 마리 앙투와네트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모차르트가 35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을 때, 빈 시민들은 ‘슈퍼스타’를 너무도 쉽게 잊고 무시했다. 모차르트는 성 슈테판 성당 밖 마차들의 정류장이었던 곳에서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몇몇 지인만이 참석한 초라한 장례식의 주인공이 됐다. 심지어 그의 시신은 빈 외곽 성 마르크스 묘지에 다른 행려병자들의 시신과 한 구덩이에 묻히고 만다. 그 이후로 모차르트의 유해도, 그의 진짜 묘지도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는 신세가 된 것이다. 가장 위대한 천재였고, 빈을 열광시켰던 슈퍼스타였던 게 사실이기는 한 걸까?


베토벤은 빈 출신도, 오스트리아 사람도 아니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22살이되던 1792년에 모차르트에게 사사를 받겠다는 생각에 빈에 왔다가 모차르트가 죽는 바람에 하이든에게 사사를 했고 빈에 정착해 죽을 때까지 35년간 빈에서 살았다.


꼬장꼬장하고 시니컬한 성격으로 사람들과 어지간해서는 친해지지 못하는 ‘꼴통’이었던 베토벤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또 그들이 요청하는 음악도 만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빈 인근 하일리겐슈타트로 거처를 옮긴 베토벤은 자살을 생각하고 동생들에게 유서까지 남긴다. 하지만 그 절박한 순간에 인류의 음악사에 가장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한다.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정말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됐을 때 그는 ‘가장 아름다운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라며 오케스트라에 합창을 얹은 교향곡 9번 ‘합창’을 만들어 냈다. 생애 최악의 순간, 최고의 작품이 탄생한 아이러니였다.


모차르트와는 달리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빈 시민 2만 명이 운집했다. 그리고 그 이후 단 한 번도 음악의 역사에 있어 가장 크고 화려한 페이지에서 베토벤이 빠진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인 9번 교향곡을 한 번도 제 귀로 듣지 못하는 불행을 안아야만 했다.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며 “죽어서 그의 곁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30살의 무명 음악가가 있었다. 슈베르트다. 훗날 ‘예술가곡의 황제’니 ‘낭만파 음악의 선구자’니 하면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반열에 오른 슈베르트지만, 사실 그는 생전 단 한 번의 주목도 받은 적이 없는 무명의 음악가였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는 달리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은 바도, 그의 곡이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린 적도 없다. 그래서 생활은 늘 궁핍했고,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어떤 음악 역사가는 슈베르트에 대해 “사실상 굶어 죽었다”고 얘기할 정도다.


그런 슈베르트는 결국 자신의 꿈을 이뤘다.


빈 시립중앙묘지 32-A구역에 베토벤과 나란히 누운 것이다. 비록 진짜 묘지는 아니지만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앞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인 모차르트의 기념비가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듯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봄 여름 가을이면 젊으나 늙으나, 여자나 남자나, 주민이나 여행자나 구분 없이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비석 앞 잔디에 눕는다. 때론 나지막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틀어놓고 피곤한 눈을 쉬게도 하고,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들으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한 궁정 문화들, 찬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귀족 문화들, 그리고 세계에서 복지가 가장 잘 된 도시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숨결을 만날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향기가 언제나 도시 전체를 감싸는 곳, 여기가 예술의 유토피아 빈(Wie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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