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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고통으로 미래 보여주는 '백탑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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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고통으로 미래 보여주는 '백탑의 도시'
  • 이석원 여행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5.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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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으로 유럽을 걷다 | ① 체코 프라하



1969년 1월 칼바람이 부는 바츨라프 광장 기마상 앞.


카를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는 22세 대학생 얀 팔라치는 멀리 프라하성을 응시한다. 지난 해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프라하의 봄’을 생각했다.


불과 7개월 만에 소련의 탱크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으며 막을 내린 ‘프라하의 봄’이었지만 얀 팔라치의 가슴에는 더 크고 찬란한 혁명의 불이 당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달 뒤, 같은 대학교 후배인 20세의 얀 자익도 얀 팔라치가 온몸에 불을 당겼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중부 보헤미아 블라비크산에서 내려와 조국을 구한다는 바츨라프 왕의 웅대한 기마상 앞에서 그 또한 ‘프라하의 봄’을 생각하고, 체코의 민주주의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시각 그들의 그 숭고한 죽음을 목격했던 이가 있었다. 후일 체코의 대통령이 되는 극작가이자 정치가인 바츨라프 하벨. 그는 얀 팔라치와 얀 자익이 온몸에 불을 당겨 체코의 민주주의를 외친지 정확히 20년 후인 1989년, 그 두 젊은이의 거룩한 죽음의 터에서 소련의 탱크와 장갑차를 물리치고 체코의 민주주의를 완성한다.


체코가 얼마나 고된 역사를 살아왔던가. 7세기 초 사모왕국으로 시작해 9세기 모라비아 왕국을 거쳐 10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에 이르러 프라하를 수도로 삼고 번창하기 시작한 체코. 1355년 보헤미아의 왕 카를 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한 때 유럽의 중심이 되지만 152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로 편입 되면서 체코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써야만 하는 굴욕의 역사를 지낸다.


1918년 겨우 오스트리아 지배에서 벗어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그것도 겨우 20년.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나치 독일의 지배에 들어가고 1945년에는 사실상 소련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1968년 피로 물든 ‘프라하의 봄’을 거치며 20년을 더 소련의 탱크에 신음하다가 1989년 벨벳 혁명을 거쳐 겨우 ‘진짜’ 독립된 국가가 된 것이다.


대개의 여행자들은 유럽에서도 가장 찬란한 중세미를 간직하고 있는 체코 프라하에서 구시가지나 프라하성이 아닌 신시가지 중심 바츨라프 광장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처절하고 지난(至難)한 고통의 역사 속에서 1918년 체코 슬로바키아 공화국 선포와 나치에 저항하던 독립운동, ‘프라하의 봄’과 벨벳 혁명의 한가운데 바츨라프 광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벨벳 혁명마저도 20년이 훌쩍 넘은 ‘역사’가 된 지금, 프라하에서 가장 화려하고 섹시한 풍경으로 전 세계 젊은이들을 흥분시키는 바츨라프 광장 일대는 고통의 역사를 딛고 찬란한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현재다.


바츨라프 광장이 체코의 현대사를 파노라마로 보여준 공간이라면, 카를교는 전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중세사의 강론장이다. 독일 엘베강까지 이르는 프라하의 젖줄 불타바강 위에서 프라하를 더욱 더 빛나게 하는 카를교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가장 찬란했던 체코의 중세를 창조해낸 카를 4세가 만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다리다.


원래 목조다리가 있던 자리에 카를 4세가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돌다리를 만들었다. 폭 10m, 길이 520m의 보행자 전용 다리인 카를교는 다리 양쪽 난간에 모두 30명의 보헤미아 성인의 동상이 조각돼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런데 이 다리에는 희한한 홀수 수열의 비밀이 있다. 135797531.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을 뜻한다. 카를 4세가 이 다리의 초석을 놓은 날짜를 시간과 분까지 표시한 것이다. 7과 9의 순서가 바뀐 것은, 유럽에서는 영국을 제외하고 날짜가 달보다 앞에 표기되기 때문이다.





해가 막 뜰 무렵 카를교는 늦은 밤까지 다리 위를 가득 메운 인생들로 앓았던 몸살을 겨우 추스른다. 간간히 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바쁘지 않게 하루를 준비하고, 이 시간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그림 때문에 굳이 새벽 시간에 다리 위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 부지런한 청춘들도 있다. 단위 면적별 가장 많은 인간의 군상이 모이는 낮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풍당당 자리 잡은 프라하성은 체코의 또 다른 영욕의 상징이다. 9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무려 700여 년 다듬어지는 동안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 양식이 더해지는가 하면 다시 르네상스 양식까지 얹어져서 지금에 이르는데, 사실 여기에는 치욕스럽고 비굴한 체코의 현대사가 숨겨져있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이전 체코 프라하가 우선 공격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치의 침공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폴란드의 바르샤바와는 달리 체코의 프라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나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바르샤바는 완전히 파괴됐지만 프라하는 온전히 중세의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그 치욕스러운 굴복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언덕 위 프라하성이었다. 그 찬란한 중세 도시를 완전히 파괴시키며 나치에 저항했던 바르샤바와, 아름다운 중세 도시를 살리기 위해 나치에게 무저항으로 문을 열어준 프라하, 누구의 판단이 더 현명한 것이었을까?


‘백탑의 도시’ ‘중세 건축물의 박물관’ ‘찬란한 중세의 역사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프라하는, 그 화려한 수식어와는 달리 그야말로 처참하고 엄혹하고 치욕적인 역사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프라하에서 만난 체코 사람들은 현재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위대한 중세의 유산을 자랑스럽다고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피지배의 처절함을 기억하고, 폭력 앞에 비굴했음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러지 말자며 소련의 탱크 앞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저항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죽어 간 광장에서 미래를 꿈꾼다.


과거는 미래를 볼 수 있는 현재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불타바강 위 카를교가 연결하는 중세의 프라하성과 현대의 바츨라프 광장. 아픈 역사를 지녀서 더 아름다운 현재의 체코 프라하는 분명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기억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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