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세종시에 처음 사람이 살았을까?

세종 문화자산이야기 | 도시 연대기

2013-10-28     김교년(고고학박사, 행복청 학예연구관)
조선시대 분묘
조선시대 분묘

땅, 대지를 연상하면 농부는 곡식을 길러내는 생산의 근원이라 생각할 것 같고, 고대를 연구하는 자에게는 보전의 장소라고 여길 것 같다. 각기 처한 자리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것이다. 가끔 수백에서 수천 심지어 수억 년 전의 생태가 어느 날 그 때 그 모습대로 발견된다. 경주, 부여, 공주 등 아주 오래된 도시에서도 그렇지만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 조선시대 건물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땅의 보존력에 놀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먼지수준의 퇴적이 쌓이고 쌓여 세월이 흐르면 엄청난 두께로 늘어나 과거를 보존한다는 사실이 그저 경이롭기만 할 뿐이다.

행복도시에서 인간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였을까. 그리고 어떤 모습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2006년부터 현재까지 땅을 한 겹 한 겹 걷어내며 문화재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문화재조사를 통해 이 도시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최근 구석기시대로 밝혀졌다. 중앙녹지공간 서편일대에서 집 자리와 같은 유적은 없었고, 3만년 전후로 알려진 후기구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에서 찌르개, 긁개, 찍개 등 구석기시대 유물 330여점이 출토되었다.

집 자리 1개만이 확인된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주거지로 선택하였다. 지금은 도시건설로 사라졌지만 해발 50~80m 높이의 많은 구릉들 정상에서는 어김없이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땅을 50~100㎝깊이로 판 후 가장자리에 벽체를 세우기 위해 촘촘히 기둥을 박고 지붕을 덮었다.

집안 중심에는 겨울을 나기 위해, 그리고 습기를 없애고 음식조리를 위해 화덕을 만들었다. 화덕은 작고 길쭉한 강돌로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형태로 조사당시에도 이 돌들 안쪽은 오랜 시간 불로 달궈져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화덕이 1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규모가 크면 2~3개를 추가 설치하였다.

백제석실분
백제석실분


이 후 원삼국시대(0~300년)를 지나 삼국시대 때 이 지역은 백제통치지역으로 많은 수량의 백제계 분묘와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구릉에는 백제석실분, 석곽묘, 성곽 등이 확인되었고, 항공촬영 등 특수한 조사방법을 통해 대단위 취락이 금강변의 배후습지일대에서 발견되어 지금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와 비교할 순 없다 해도 강대한 지역 세력의 존재를 입증할 만 대형 분묘와 주거지, 성곽 등이 조사되었다.

구석기시대 유물
구석기시대 유물


재미있게도 행복도시 6개 생활권 중 중앙행정과 국제문화 지역, 시청사 건립지역, 의료복지시설이 들어설 지역 등이 원삼국과 백제시대에도 3개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도시 내 권역별 연구가 진전되면 내가 살고 지역의 역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될 것 같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량은 적은 편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도시전역에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문중별로 문중묘지가 조성되었고 인근에 재실이나 서원 등이 건립되었다. 유적의 수량만을 본다면 최근의 역사이고 잘 관리되었기에 조선시대 분묘가 가장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1400년대 분묘는 조선시대 국가의례규정인 국조오례의에서 정한 숯이나 역청을 사용한 장례방식이 적용되어 사료적 가치가높게 평가되고 있다.

장차 행복도시만큼 고대문화를 연구하기에 좋은 지역도 없을 것이다. 면적이 광대한 반면 오히려 짧은 기간 안에 촘촘한 조사가 진행되어 아주 자세한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아직 유적이나 유물을 정리하는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연구가 충분치 못할 뿐이지 행복도시가 우리나라 고대문화 연구에 공헌할 날도 멀지 않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