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비, 증기, 속도를 그리다

2013-10-15     세종포스트
'비.증기.속도' 윌리엄 터너, 1844, 유화, 91×122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영국
'비.증기.속도' 윌리엄 터너, 1844, 유화, 91×122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영국

어김없이 계절은 변한다. 겨울은 힘겹지만 생명을 품고 있다가 봄에 내어주고, 봄은 두텁고 풍요로운 여름을 품어 향기를 발한다. 활발한 습기와 왕성한 기온으로 여름내 피우고 살진 가을은 하나, 둘 그 열매를 튼실하게 가꾸며 겨울을 준비한다. 이것은 지구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 섭리로 생각된다.

봄의 풋풋한 아지랑이, 여름의 장대비와 강한 햇볕, 가을의 떨리는 아침 안개, 겨울의 하얀 눈과 청명함, 계절은 이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화가들은 이런 풍경이나 심상을 그리고 표현한다. 오래전부터 평면에 그려지는 회화에서는 비나 수증기의 밀도를 표현하는 것에 고민하였고, 움직이는 것에 대한 적확한 표현을 찾으려고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그리기도 했다.

일테면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 화가는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이다. 그는 영국 런던 코벤트 부근의 이발사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이며 14세 때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해 전통적인 수업을 받았다. 당시 영국미술은 아카데믹한 풍경화외 이상적이고 영웅적이며 정적인 작풍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27세에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어 일찍이 성공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터너는 점점 정적인 세계로부터 동적이고 현란한 색채의 세계로 옮겨갔다. 당시 유럽에서는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어느 때보다도 광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그는 "색채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주장한 괴테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비, 증기, 속도>는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다. 화면의 증기기관차는 속도를 느끼게 하며 다가오며 원근의 저편 깊이를 나타낸다. 철교, 다리, 떠있는 배는 화면에 나타난 인위적인 것들이지만 이것들은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어떤 역동적인 기(氣)에 싸여 간신히 그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긴장된 화면은 어두움과 밝음, 상이한 색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녹아드는 형태를 통해 자연의 광폭함과 운기를 절묘하게 표현한다. 습기를 머금은 대기, 그 속을 질주하는 속도감이 불러일으키는 공기들의 움직임, 이 표현기법들은 모네와 피사로에게 영향을 주어 훗날 인상주의를 예고하기도 했다.

그는 화면에서 우연한 효과를 이용할 줄 안다. 감정적 색채, 물감 흔적, 지문, 긁힌 자국 등을 살려 대기와 움직이는 기운을 구현한다. 대자연의 현상과 순리에서 영감을 얻었고 이러한 표현은 추상화처럼 보이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 스스로 폭풍이 치는 배위에 밧줄로 묶고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그려냈듯이 대자연이 주는 영감과의 사투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며 우리가 바뀌는 계절에 대해 대지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것과 비유해 본다. 우리가 시각으로 보지 못한 기운들은 미립자로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들이다. 이 기운과 더불어 우리의 감각은 깨어나고 자라며 소멸하고, 다시 소생한다. 터너의 작품은 이 원리를 극대화한 것으로 다가온다. 어제가 오늘일 수 없고, 오늘이 내일 수 없지만 대지의 운기변화로 우리는 호흡하며 이 땅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