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에 오늘을 참고 견뎌라?

길, 그리고 사람살림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013-10-14     세종포스트

현재에 굴하지 않고 버티는 힘 독려한 푸슈킨
고달픈 지금 인내하라는 뜻으로 오해하기 쉬워

예능·드라마엔 신데렐라와 불륜만 가득
현실엔 겨우 일등 된 존재와 꼴찌들만 있어

의통 "모든 사람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확정"
내 삶 부정·왜곡되는 현실 고치려 노력하란 뜻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나 /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시. 러시아 작가 푸슈킨(1799~1837)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일부분이다. 때로는 인생을 달관한 자가 들려주는 충고로도 들리고, 때로는 지나간 삶에 충실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담은 것으로도 느껴지는 이 시. 인내하고 또 인내하여서, 지금의 슬픔 지금의 분노를 극복한 아름다운 내일을 기약하는, 그래서 현재에 굴하지 않고 버티는 힘을 독려하는 이 시.

그런데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아니 익숙한 것이 아니라 친숙하게까지 들린다? 그것이 나는 슬프고, 그것에 나는 분노한다. 왜? 이 시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잘못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부정, 그리고 그 잘못된 현실을 극복한 내일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것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질 때에는 왠지 잘못된 현재에 대한 인내 혹은 허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혀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곧 고달픈 현재를 참고 견디어 낸다면 아름다운 내일이 있을 것이기에, 지금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인상. 그것 때문이다.

실상 80년대 이전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있어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 혹은 그 이후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있어, 내일을 위해 현재를 참고 견딘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이기도 하다. 좀 심하게 표현해서, 이른바 88만원 세대에게 1000만 원 짜리의 월급쟁이가 되는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 88만원이라는 오늘의 현실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해보라. 누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일 수밖에 없다. 세대차니 뭐니 하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기성세대의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삶이 그대를 속이는’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강요되고 왜곡된 현실만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일등 대학’을 졸업하면 ‘일등 회사’의 회사원이 될 수 있다고 하는 허황된 수사, 혹은 강요받은 줄서기에 대한 당연함을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난무하는 언론의 수사만이 존재할 뿐인 것이다.

나도 어쩌다가 텔레비전을 볼 때가 있다. 한참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텔레비전을 끄고 만다. 여기도 저기도, 예능과 드라마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예능인들의 입담이 난무한다. 거기에 우리 삶의 현실이 존재할까? 신데렐라 스토리와 불륜이 난무한다. 우리 삶의 현실이 그러할까? 아니다. 우리 삶의 현실에는 일등을 위해 줄서도록 강요당하다가 겨우겨우 일등이 된 존재와 그렇지 못한 꼴찌들만 존재한다. 일등 이외에는 모두 꼴찌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대부분은 88만원의 줄에 서서 암담한 현실을 체념한 채 살아간다. 체념조차도 실은 강요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은 예능과 드라마 속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채로 있을 뿐이다.

고려 초기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던 스님이 있다. 일찍이 유학을 가서 당대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에게서 공부하고, 천태종이라고 하는 불교 종파의 조사 반열에 올랐으니, 가히 성공한 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운 의통이라고 하는 스님이다. 이 스님을 기점으로 대단히 활발하게 신앙결사가 이루어지면서 중국 천태종이 부흥하는 발판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 천태종의 중흥조라고도 일컬어지는 분이다.

의통 스님은 당신 주변의 인물들을 ‘향인(鄕人)’ 곧 ‘내 고향 사람’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주변의 한 스님이 그렇게 부르는 연유를 물었다.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정토(淨土)로써 내 고향을 삼는다. 모든 사람들이 정토에 가서 태어날 것이니, 다 내 고향 사람이다."

정토란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극락세상이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세계 이른바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지만, 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극락정토세계에 태어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결국에는 극락정토세계에 태어날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 온 세상의 고통 받는 중생과 나는 고향이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극락정토세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추측이 아니다. 극락정토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확정되어 있다고 의통 스님은 말한다.

혹자는 이 말을 듣고서 내세에 극락정토에 태어날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니다. 불교에서 극락정토에 태어날 것이 확정되었다는 의미는 부처로서 완성된 존재가 될 것이 확정되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 가장 완성된 존재인 부처가 될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이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라는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저 중생이 중생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부처될 것이 확정된 존재라는 소리다.

부처될 것이 확정된 존재를, 중생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고 말까? 그렇지 않다. 고귀하고 존경받아야 할 존재라고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확정된 저들 중생의 삶 하나하나는 귀하게 여겨지고 소중하게 받들어져야 되는 어떤 삶이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천하게 여겨지거나 무시당해도 좋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소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미래 때문에 왜곡되고 고통 받는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현실을 의통스님은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미래, 잘 살아가는 미래가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잘못된 내 삶, 소중하게 여겨져야 할 내 삶이 부정되고 왜곡되는 현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개선을 위한 노력의 끝에서 아름다운 미래, 잘 살아가는 미래가 실현되는 것이다.

대부분 우리는 우리 삶의 어려운 처지나 잘못된 현실에 대해 남 탓 혹은 내 탓으로 돌려버린다. 그러나 남 탓으로만 돌려지는 잘못도 내 탓으로만 돌려지는 잘못은 없다. 불교 팔정도의 첫 번째 실천항목인 정견(正見) 곧 ‘바르게 보기’는, 잘되고 잘못된 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해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찬찬히 관찰해서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세하게 찬찬히 살펴보면 ‘삶이 그대를 속이는’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삶에 대한 그릇되고 왜곡된 가치관의 강요’만이 존재한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제발, 드라마 팔기나 예능 팔기 좀 그만 하세요."

"제발, 드라마나 예능 좀 그만 보세요."

"제발, 텔레비전 좀 내려놓고, 생각 좀 하시죠. 제발 텔레비전 좀 내려놓고, 가족끼리 이야기 좀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