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자란 풀로 붓을 매어 지리산을 그리다

2013-09-09     박석신(목원대 외래교수)

쥐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은 쥐 몇 마리를 잡아야 만들 수 있을까?

내 붓통에도 작은 크기의 쥐 수염 붓이 들어있지만 아직도 붓을 잡을 때마다 궁금한 대목입니다. 대개는 토끼털과 양털로 붓을 만들지만 사슴 겨드랑이 털이나 닭털, 어린아이 머리털로 만든 붓도 있답니다. 붓은 화가의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붓은 화가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화면에 담아내는 화가의 마음손입니다.

십 수 년 전 스케치 여행길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답니다. 급하게 출발하느라 화구통에 붓을 챙기지 못한 것이지요. 휴대용 벼루에 먹물을 준비하고 근사한 풍광 앞에서 화첩을 펼쳤는데 붓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화가에게 이만한 당혹감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작정하고 떠나온 스케치여행을 이대로 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주변에 붓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앉은자리에 풀 한포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풀을 뽑아 잔뿌리를 다듬고 끈으로 묶었더니 나름 붓 모양새가납니다. 모필의 부드럽고 섬세함에야 비할 수 없지만 거칠지만 현장감 있는 질감이 오히려 생동감을 살려내 줍니다.

이제는 화첩기행을 떠날 때 꼭 삼끈을 챙겨갑니다. 지리산에서 자란 풀을 삼끈으로 묶어 그 붓으로 지리산의 기운을 그립니다. 월출산에서 자란 풀로 붓을 매어 월출산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어쩌면 지리산 품에서 자란 풀뿌리는 지리산을 가장 잘 아는 친구이고 월출산의 풀 한포기는 월출산이 매일 달빛과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계룡산에서 자란 풀로 붓을 매어 은선 폭포 오름길에서 만났던 바위틈 소나무에게 말을 걸어봐야겠습니다. /

목원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