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쉬어라, 5분만이라도”

지눌스님, "애욕.어리석음.성냄이 번뇌"

2013-06-18     석길암(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한박자 만큼의 몸.말.마음의 여유를

지난번에 소소한 일상에서 얻는 즐거움 또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딱 한 박자만큼의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딱 한 박자만큼은 어느 정도이고, 어떤 정도일까?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의 여유를 의미한다.

첫째는 몸의 여유다. 몸이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피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피곤하더라도 조금은 버틸 수 있는, 참을 수 있는 만큼의 건강을 의미한다. 쉴 새 없이 바쁜 현대인들에게 제일 쉽지 않은 것이 바로 몸의 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옛 사람들은 하루해가 저물면 어쩔 수 없이 몸을 쉬게 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한밤중에 몸을 움직일 까닭이 없다. 그러나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밤중에도 무엇엔가 혹은 어쩔 수 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다. 밤낮이 따로 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몸에 적당한 휴식을 주기가 더욱 쉽지 않아진 것이다. 병이 날 만큼 무리하지 않으면서, 해야 할 일에 전념하는 것, 그것이 몸의 여유다.

둘째는 말의 여유다. 말에 무슨 여유가 있을 것인가 하겠지만, 말하는 것에도 여유란 것이 있다. 말하는데 여유를 얻는 방법의 첫 번째는 듣는 것이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입장이 되면 자연스레 여유를 얻게 된다. 단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어야만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말하는데 여유를 얻는 두 번째의 방법은 상대방이 말을 걸어왔을 때, 의도적으로 한 템포를 쉬었다가 답변을 주는 것이다. 한 템포를 쉬는 동안 말은 건성으로 내뱉어지지 않고, 한 번 걸러져서 나가게 된다. 한번만 말을 거르면, 그 말에는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 배려가 곁들여지게 된다. 이것이 말의 여유다.

세 번째는 마음 씀의 여유다. 사실 이 마음 씀은 몸짓과 말짓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에 부닥치고 사람에 부닥쳤을 때, 그 일과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대응은 신중해지게 마련이다. 거기에서 마음 씀의 여유가 생긴다. 내가 상대방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데, 마음 씀에 여유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면 건성이게 마련이고, 이러한 마음 씀은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이것이 마음 씀씀이에 있어서 여유다.

이 세 가지의 여유를 가지고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자격,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마냥 소소한 즐거움이 소소한 즐거움으로만 다가올까? 그 소소함을 깨뜨리는 적들은 쉴 새 없이 공격해오기 마련이다. 그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깨뜨리는 모든 일들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부른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선사(禪師)인 보조 지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익혀온 애욕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생각이 마음에 얽히고설켜 잠깐 수그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치 하루 걸이 학질과 같다. 어느 때든지 더욱 수행하는 방편과 지혜의 힘을 써서 마음속에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한가하게 근거 없는 이야기로 허송세월 하고 있으면서, 마음을 깨달아 삼계(三界)에서 벗어나는 길을 구한다고 하겠는가?"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익혀왔다’는 것은, 번뇌 곧 즐거움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보조 스님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애욕이다. 집착하고 욕심내는 마음을 말한다. 왜 야욕이 번뇌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자기가 바라고 있는 것이 욕심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이 정도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이유를 덧댄다. 그러나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 정도에 있어서 사람들은 늘 스스로에게는 관대하며, 남에게는 홀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왜 말하지 않는가? 남의 눈에 있는 티는 크게 보여도 내 눈에 들어앉은 바위는 보이지 않는다고.

둘째는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내세우는 경우 역시 드물지만, 정말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도를 고려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경우의 수를 모두 고려하는 지혜가 그때그때 가능할까? 스스로가 슈퍼맨이 아닌 이상 나는 어리석지 않다고 자만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번뇌가 따르지 않을 까닭이 없다.

셋째는 성내는 것이다. 유일하게 사람들이 스스로 알 수 있는 번뇌의 원인이다.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몰라도, 자신이 욕심내고 있는 줄은 몰라도, 적어도 성 내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안다. 화를 번연히 내고 있고,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런데 그 ‘화’를 멈추지는 않는다.

이러한 세 가지가 쉴 새 없이 나를 자극하고 나를 힘들게 한다고 보조 스님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조 스님은 "잠깐 수그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치 하루 걸이 학질과 같다"고 표현한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고, 잊을 만하면 아프게 하는 까닭이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그런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럼 여유 있는 행동은 어떤 것인가? 보조 스님은 옛 선사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선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어떻게 일어나야 할까? 당연히 땅을 짚고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급하게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을 관찰해보라. 급한 마음이 앞서면 땅을 짚을 생각은 없고, 양 손을 허공에다가 허우적거릴 뿐이다. 몸은 땅에 엎어져 있는데, 마음은 벌써 저 앞쪽에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두 손으로 땅을 짚어야만 일어설 수 있다는 단순한 그 이치를 조급한 마음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소소한 일상에서 번뇌를 내려놓고 여유를 통해서 소소한 즐거움에 빠지는 방법? 간단하다.

몸이 힘든가? 그러면 쉬어라. 이래서 저래서 못 쉰다는 변명은 늘어놓지 말고, 그냥 쉬어라, 단 5분이라도.
마음이 힘든가? 그러면 쉬어라. 이래서 저래서 못 쉰다는 변명은 늘어놓지 말고, 그냥 쉬어라, 단 5분만이라도 책상머리에 얼굴을 대고서.

입이 힘든가? 그러면 쉬어라. 이래서 저래서 못 쉰다는 변명은 늘어놓지 말고, 그냥 쉬어라, 단 5분만이라도 입에 군입거리를 물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