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에게 배우는 자기경영과 삶의 지혜

독서경영

2013-06-18     안계환(독서경영연구원장)

사마천 필생의 업적인 <사기>. ‘사기’라는 명칭은 삼국시대 이후 붙여진 이름이고, 저자인 사마천은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다. <사기>는 세계최초의 통사로서 중국인이 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로부터 한무제에 이르는 250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본기와 열전, 표, 서로 구성되어 있는 기전체의 사서로 도합 130권, 52만 6500자에 이르는 대저다.

<사기>는 수많은 세월동안 동양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는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 유려하고 생동감 있는 문장과 역사서이면서도 문학적 필체가 매우 우수하기 때문이다. <사기>보다 후세에 쓰인 <한서>나 <자치통감> 등의 사서들은 왕이나 지배층의 통치기록 위주로 서술하고 있는데 사마천은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 없이 등장시키고 있다.

사마천은 한무제와 동시대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의 교외로, 보통 사마판 (司馬坂)이라 불리는 부근이다. 이 근처에 황하의 나루터로 유명한 용문(龍門)이 있어 등용문의 고사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이 나루터 가까이에 용문산이 있고 그 아래 구릉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는데 부친을 따라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살았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태사(太史, 사관)였고 그의 부친 사마담도 학문에 조예가 깊었기에 사마천도 부친에게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가 열 살 때 이미 고대문자로 된 경서를 암송할 수 있었고 좌전, 국어, 세본(世本)과 같은 역사문헌을 읽을 수 있었다. 부친은 한무제 때 태사령에 임명됐고 수도 장안에 이주했다. 덕분에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을 스승으로 모시고 고문상서(古文尙書)를, 금문의 대가인 동중서(董仲舒)로부터 공양춘추(公羊春秋)를 배울 기회를 가졌다. 이후 성장해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되고 본격적으로 사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사마천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자기 경영과 인생의 지혜를 들어보자.

첫째, 위대한 역사서 <사기>는 책상 위에서만 집필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태사령이라는 직책에 있었기에 다양한 참고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열람한 책은 103종에 이르며 당시의 거의 모든 서적을 보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장 탐방을 했는데 스무 살 되던 해 사마천은 2년간 천하여행에 나섰다. 이 여행은 부친의 강력한 후원아래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역사유적을 탐방해 잊혔던 사람들을 찾고, 사람들을 만나 인정이나 풍속을 이해하는데 여정을 보냈다. 이는 뒷날 사기저술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의 실행이었을 것이다. 초나라 비극의 영웅 굴원이 몸을 던졌던 멱라강을 방문해 그와 감성을 나눴고 한신의 고향을 찾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수집했다. 벼슬길에 나아간 후에도 서남이 정벌에 나섰던 일, 천하를 한 번 더 유람해 자료 수집을 하기도 했다.

둘째, 필생의 업적을 위해 인생의 굴욕을 견뎠다.

흉노족과 싸운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부형(腐刑, 궁형)을 당하게 됐고, 벌금을 낼 수 있다면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말단 관리였던 그는 불가능했다. 가문의 명예가 존중되는 시대에 치욕스런 상태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선친의 유업이면서 자신의 평생의 업적을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은 그를 이겨내게 했다.

셋째, 시대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사기>가 다른 역사서들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그 안에 담긴 사마천의 현실적인 역사관이다. 명분보다는 실질을 중시하는 관점을 가졌기에 제왕이 되지 못한 항우를 본기에 실어 ‘고조본기’앞에 배치했다. 사마천이 ‘항우 본기’를 ‘사기 본기’에 넣은 것은 그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가 진한 혼란기에 실질적인 통치 지위를 갖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진섭(陳涉), 진승(陳勝)을 열전이 아닌 세가에 편입시킨 데서도 그러한 생각이 엿보인다. 진(秦)나라 말기 일개 고용살이 신분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이 됐다가 불과 6개월 만에 평정된 진섭을 통해 사마천은 거대 제국 진나라의 멸망을 그렸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위상이 북방의 전통 강국 진(晉)나라나 동방의 강소국 노(魯)나라, 정(鄭)나라의 위상에 비해 현저히 낮은 비주류였음에도, 이편을 ‘사기 세가’의 첫머리에 두었다는 것도 매우 독창적인 안목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