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볼모’ 소현세자 살린 조계원의 지략

성씨 이야기 | 세종시와 인연 깊은 양주조씨

2013-09-02     세종포스트

아들 5형제 급제, 사후 영의정에 오르기도

세종시 전동면 송정리에 있는 조계원 묘비
세종시 전동면 송정리에 있는 조계원 묘비


양조조씨는 조계원(趙啓遠)과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가장 큰 번성을 누리게 된다.

조계원(1592∼1670)의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준수(趙俊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남(趙擥)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에 오른 조존성(趙存性)이며, 어머니는 이신충(李藎忠)의 딸이다. 신흠(申欽)의 사위로 숙부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뒤에 이항복(李恒福)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조진석(趙晋錫) 묘갈명(墓碣銘)-소론의 영수 파평윤씨 명재 윤증 지음
조진석(趙晋錫) 묘갈명(墓碣銘)-소론의 영수 파평윤씨 명재 윤증 지음


1616년(광해군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인조반정 후 중죄인을 추국하던 의금부의 종5품 도사(都事)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보던 과거)에 을과로 급제, 사간원의 정언(正言, 정6품 간언관)을 거쳐 형조좌랑(佐郞, 정6품 법무부 주무관)이 되었다. 1631년 일시 파직당하였다가 그 뒤 1636년 병자호란 때 유장(儒將)으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백관을 규찰하고 탄핵하던 사헌부(司憲府)의 정4품 부장검사인 장령(掌令), 옥당(홍문관)의 수찬(修撰)의 일을 맡았고, 훗날 사간원의 종3품 사간(司諫)이 되었다. 이 때 김상헌(金尙憲)이 탄핵당하자 이를 힘써 구원했다.

1641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보덕(輔德, 정3품)으로서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의 진저우(錦州) 공격에 참가하게 되자 그를 시종(侍從 모심), 모래주머니를 이용하여 성을 쌓는 기계를 써서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계원은 포대에 모래를 담아 쌓고 물을 이용하여 이를 얼려서 성을 쌓는 기계를 착안했던 것이다.

『또 하루는 세자가 궁중을 지키는 군사에게 화를 내며 손수 채찍질하자 조계원이 간하여 말하길 "어찌 스스로 위의(威儀)를 손상시키십니까?"라 하고 채찍을 청하여 땅에 던져버리고는 흐느껴 울었다. 이에 세자는 깊이 깨닫게 되어 채찍질하기를 그만 두고는 이후 몸가짐을 조심히 하였다. 또한 전쟁 중에도 틈틈이 세자에게 책을 펴 강론을 펼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편집자』

심양에서 돌아와 수원부사(府使 정3품 수령), 홍청감사(洪淸監司 종2품 충청도 관찰사), 동부승지(同副承旨), 예조참의, 왕의 비서실장인 도승지(都承旨), 경상감사 등을 거쳤다.

1662년(현종 3) 형조판서(정2품 법무장관)에 이르러 사직하고 보령에 은퇴하여 한가한 여생을 보냈다. 그 뒤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민전(民田, 백성들이 조상대대로 전래하여 경작하는 사유지)을 광점(廣占)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은 조계원의 신도비문에서 그의 행적을 소개하면서 재주를 다 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소민공(昭敏公 : 아버지 조존성)께서 우계(牛溪)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이미 아름다운 규범이 있었고 공은 또 나라를 대표할 선비의 기풍이 있어 어릴 때부터 능히 그의 재주를 인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이 또한 조정에 나가 직분을 다하였고 국은(國恩)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였는데 불행히 훈척들에게 거슬려서 많은 해를 입고 늦게 벼슬길에 등용되었으나 재주를 펴 다할 수 없었으니 아는 자는 한스럽게 여겼다"라고 그의 인물됨을 칭송하였다. - 편집자』

조계원의 글씨
조계원의 글씨

조계원의 큰 아들 조진석(趙晋錫,1610∼1654)은 1649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대궐에서 보던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고, 1651년(효종2) 병조좌랑을 거쳐 사간원의 정6품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당시의 시폐(時弊,그 시대의 잘못된 폐단) 특히 내수사(內需司, 조선 왕실 재정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의 모속자(冒屬者) 등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득실에 관하여 상소하였던 바, 그 비판이 적절하다는 칭송이 많았다.

1654년 사헌부의 정4품 부장검사인 장령(掌令)으로 있으면서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 억울함을 풀음)을 상소하였다가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인 대사헌(大司憲) 이시해(李時楷) 등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병사했다. 훗날 그의 관작은 복구됐다. 글씨에도 능하여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있는 소요당대사비(逍遙堂大師碑)를 썼다.

조계원의 둘째 아들 조귀석(趙龜錫), 셋째 조희석(趙禧錫), 넷째 조사석(趙師錫), 다섯째 조가석(趙嘉錫) 등이 모두 뛰어나 양주조씨 가문의 번창을 누리게 된다.

조계원의 아들 7형제 중 5형제가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1671년(현종 12) 장남 조진석(趙晋錫)이 원종공신의 훈록을 받자 아버지 조계원은 의정부의 종1품 재신인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이어 1676년(숙종 2)에는 다섯째 아들인 조가석(趙嘉錫)이 참의(參議 정3품 차관보)가 되자 영의정에 가증(加贈, 위계를 더 높임)되기도 했다. 조계원의 묘(墓)는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全東面)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