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철학의 토대가 되다

철학이야기 | 걸어 다니는 시계, 임마누엘 칸트

2013-06-23     정승태(침례신학대 종교철학 교수)

왜 우리는 윤리적이어야 할까? 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할까?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한 철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다. 그는 일명 ‘걸어 다니는 시계’라고 불린다. 이는 그가 그만큼 삶을 원칙과 윤리적 기준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누군가? 왜 우리 시대는 칸트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칸트는 1724년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서 마구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재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로 알려진 쾨니히스베르크를 한 번도 떠나보지 못한 칸트는 경건한 청교도의 경건주의였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신앙적 정신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는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1755년에 박사학위와 교수자격증을 얻었다. 학위를 마친 후 그는 생계를 걱정할 만큼 매우 어려운 생활을 살았는데, 이 같은 어려운 생활은 1770년 정교수가 되기 전까지 약 15년 동안 지속됐다. 정교수가 된 후에 예나대학과 에어랑겐대학이 그를 초대했지만, 칸트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단순하고도 검소한 삶을 규칙으로 여기며 살았고, 식사는 하루에 한 번만 했다. 실제로 그의 생활방식과 연구습관은 너무나 규칙적이고 엄격해서 사람들이 그의 일과에다 시계를 맞출 수 있다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흔히 칸트를 ‘걸어 다니는 시계’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는 항상 주변을 말끔히 정돈하는 습관을 가졌고, 만일 정리정돈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잠을 잘 때는 이불을 둘둘 말아 누에처럼 잤다. 책을 보거나 학문에 몰두할 경우에는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고 하는데, 옆집 수탉이 낮에 가끔 우는 바람에 그것을 견디지 못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주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 역삼각형의 하얀 얼굴을 가진 그의 외모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꼼꼼하고 예리하며 논리에 어긋남이 없는 예지적 지식을 가진 그는 학자의 전형이다.

우리가 알듯이, 데카르트의 합리론과 로크의 경험론을 드러낸 17세기의 시대가 임마누엘 칸트의 사고에 의해서 18세기의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연다. 18세기는 단연 칸트의 시대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사고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도 비견된다. 이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종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칸트의 철학을 ‘저수지’에 비유하곤 한다. 이전의 모든 사상이 칸트에 의해서 종합되고, 그 이후의 모든 철학이 그로부터 새로운 통찰을 얻거나 사유의 토대를 이룬다.

칸트는 지식의 근원을 경험으로 보는 경험론과 지식의 근원을 이성으로 보는 합리론을 종합하면서 그의 특유한 철학을 태동시킨다. 그것이 이른바 ‘비판철학’ 혹은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한다. 그가 체계화한 ‘비판철학’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되지만 반드시 경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인식이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감성과 직관된 것에 개념화 작용을 가하는 오성 혹은 지성이라는 두 개의 원천에 의해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경험론은 오성의 논리적 사유 기능을 과소평가했고, 합리론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감성의 기능을 외면했다. 따라서 칸트는 합리론의 독단주의로 빠질 위험과 경험론의 회의주의에 빠질 위험을 동시에 비판했던 것이다. 당시 칸트가 제시한 것은 매우 간명했다. 그것은 오직 이성 비판을 통해서만 독단주의(혹은 관념주의)와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일생에 어떤 괄목할 만한 사건들의 기복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정치적이고도 사회적 활동도 전개하지 않았던 칸트이지만, 우리가 그를 생각하면, 우리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을 떠올린다. 이는 이 작품이 아마도 칸트를 존재하게 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난해하고도 어려운 이 작품인 <순수이성비판>은 1781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의 철학이 선험철학으로 정의된다. 선험이란 ‘경험에 앞선’의 의미를 가진 뜻으로 경험 전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에 의존하는 철학을 그는 주장하고 싶었다. 이 작품을 출판한 후에 칸트는 그의 가장 중요한 윤리학 작품들인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1785), <판단력 비판>(1790),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1793) 등을 출판했다.

잘 알려진 그의 유명한 두 가지 관심은 하늘과 도덕법칙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늘 새롭고 점점 커지는 경외감으로 내 마음속을 가득 채워서 내가 갈수록 더 자주, 더 꾸준하게 반추하게 되는 두 가지 사실이 있으니, 내 머리 위의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 바로 그것이다"(순수이성비판).

그에게 별이 빛나는 창공은 이 세계라는 운동 중인 물체들의 체계이며, 거기에서의 모든 사건은 특수하고도 결정적인 원인을 갖는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려고 했고, 동시에 모든 인간들은 도덕적 의무감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칸트가 평생 인간 존엄성이라는 관념을 강조한 철학자로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격에 대해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서 대하지 않도록 행동하라."

이 원리는 아마도 당시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의무의 윤리학을 강조한 칸트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하다. 특히 버트란트 러셀은 그를 ‘재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비윤리적 삶을 누리는 사람들, 한 평생 살아도 얻을 수 없는 물질적 부를 비윤리적으로 축적한 그들을 바라보며 칸트를 동경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남의 몫을 앗아가지 않고 타인을 해치지 않아야 하는 윤리적 삶의 정언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