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서영이’에 왜 열광했나

길, 그리고 사람살림

2013-03-22     석길암(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국민드라마 <내 딸 서영이>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나는 종영되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 종영이 되어서 드디어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기에 ‘드디어’라는 환희에 찬 표현으로 내 마음을 드러낸다. 왜 아쉽지 않느냐고? <내 딸 서영이>가 방영되는 동안, 다른 집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의 주말 저녁은 <내 딸 서영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분위기에 나도 편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끝나니까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은 사라졌기에 시원하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심정이다.

전 국민의 절반을 텔레비전 앞에 붙잡아두고 가슴 뭉클하게 했던 드라마. 그런 드라마의 히트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한국인은 참으로 위대하다?

한국인은 참으로 위대하다. 왜? 매일 이어지는 월화드라마와 수목드라마 그리고 주말드라마를 보면서, 슬픈 장면만 나오면 저절로 눈물을 쏟을 수 있으니까. 그만큼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드라마의 내용을 쉽게 자기 일인 양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남의 슬픔 남의 아픔을, 자기의 슬픔 자기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대자비의 출발점 혹은 대자비 그 자체로 삼는다. 한국인들이 드라마 내용을 자기 것인 양 받아들여 감정이입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고 있노라면, 그 동체대비(同體大悲)의 탁월한 심성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 존경스럽기조차 하다. 그런데 정말 한국인은 위대한 것일까? 그런데 정말 한국인은 그런 훌륭한 심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일까?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한국인의 심금을 울려 텔레비전 화면 앞으로 이끌어낸 드라마 대부분은 ‘나와는 다른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테마로 삼지 않는다. 그런 류의 드라마 대부분은 ‘꼭 내 이야기 같은 남의 이야기’를 테마로 삼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대부분에서 한국인은 ‘남의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시청했던 것이다. <내 딸 서영이>를 예로 들자면, 서영이의 아버지에게서 남의 아버지 이야기를 본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이야기를 떠올렸기 때문에, 전국의 이른바 한국인들은 더욱더 몰입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에게는 다른 시어머니의 잘난 며느리만 보이고, 며느리에게는 잘해주는 시어머니만 보이고, 나이든 중년 부인들에게는 가족이 다 있는데도 외로운 여자만 보인다. 평생 돈 벌어오라는 소리만 들었던 조기 퇴직한 남편에게는, 밖으로 가출하는 늙은 퇴직자 남편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 ‘남의 이야기’, ‘내 관심이 없는 이야기’라면 어떨까?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시청률 올리기 쉽지 않은 단막극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된다.

한국인이 흔히 사용하는 속담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 나라님도 구하지 못하는 가난이니, 내가 나서 봤자 어쩌겠는가. 이것이 한국인의 또 다른 심리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간단하다. ‘나라님도 못 구하는 가난’이라는 말 속에 한국인은 또 다른 말들을 대신 집어넣는다. ‘네 탓이다.’ 정말 그럴까? 이 말 속에는 ‘내 탓은 아니다’라는 속내가 숨겨져 있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회피하고 싶은, ‘내가 왜 생고생을 해야 돼?’라는 어처구니없는 얄팍함이 그 심리 속에 숨겨져 있다.

필자를 포함해서 <내 딸 서영이>에게 푹 빠졌던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왜 ‘자기 이야기’에만 반응하십니까? ‘남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보는 듯한 <내 딸 서영이>에게는 그렇게 관심을 쏟으면서, 왜 정작 내 주위에 힘든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을까? 그것은 ‘나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왠지 나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여겨져서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한국인은 익숙한 자기 이야기에만 열광하고 공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5천 만이나 되는 한국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하고 얼굴이며 살아 온 내력이 똑같은 사람이 있을까. 쌍둥이라도 제각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이 모여서 살아간다.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간다. 그 속에서 나하고 같은 부류의 사람만, 나하고 같은 부류의 이야기에만 공감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 또 한국인이다. 우리네 가슴 뭉클하게 하는 드라마가 그것을 반증한다. 남의 이야기는 들을 준비조차도 되지 않은 것이 한국인일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부처님은 행복한 삶, 만족한 삶, 평화로운 삶을 얻는 첫 번째 방법으로 ‘바르게 보는 견해’[正見]를 제시한다. 그 바르게 보는 견해란 것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습관, 선입견, 관습, 사회 통념에 좌우되지 않고 어떤 사람, 어떤 사물을 찬찬히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습관, 선입견, 관습, 사회 통념 같은 것들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익히고 배워서 익숙해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우리는 그 관점에 얽매여서, 그 관점과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 그 관점에서 벗어난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접하면 억지를 부리고 또 강력하게 저항한다. 그리고 그런 억지와 저항이 부딪칠 때 갈등을 일으키고 충돌하게 된다. 부처님은 특정한 견해가 항상 옳다고 하는 억지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만 행복과 만족과 평화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혹 오늘 저녁에도 꼭 봐야 할 드라마가 있다면, 생각해볼 일이다. 혹 나는 내가 공감하는 어떤 일에만 편들지 않았는지? 그렇게 한 생각 돌리는 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