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전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

[주필의 시선] 가을은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2021-08-18     이계홍
가을색과

[세종포스트 이계홍 주필] 가을의 신호를 가장 빨리 알리는 건 역시 아침 저녁의 바람이다. 그토록 사람 늘어지게 하던 무더위도 8월 하순으로 접어드니 아침 저녁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의 전조를 알리고 있다.

지구 운행의 시계는 어김없이 돌아가 어느덧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물론 추석 전까지는 몇차례 더위가 있을 것이다. 언제 그랬더냐 싶게 34-35도를 넘나드는 무더위다 한두 번은 덮칠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거리의 아스팔트를 녹였던 무더위는 크게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가을이 올 때마다 카페의 음악실이 먼저 가을의 신호를 알려준다.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비롯해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흘러나온다.

이런 때, 푸른 들에는 잠자리가 한가롭게 날고, 해바라기, 구절초, 쑥부쟁이, 조팝나무가 향기를 품고 피어있다. 가을의 꽃들은 대개 소박하고 청초하다. 그래서 그리움이 그윽히 배어나 보인다.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리는 모습은 누구나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도 안겨준다.  

누구나 좋아하는 계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름의 지겨움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가을의 고마움을 알 것이다. 사계절 모두 특징이 없는 것이 없으니 사계절 모두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가을은 무언가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준다.  

충청도에 산다는 것은 그지없는 행운은 안고 사는 의미를 준다. 품 넓은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있고, 계곡 맑은 물과 유서깊은 사찰이 있다. 필자는 최근 무창포 해수욕장을 다녀왔다. 바닷물에 들어가는 대신 주변의 송림 사이를 걷고, 해변의 식당에서 싱싱한 해물을 맛보고 왔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위협하지만 우리의 소소한 행복까진 앗아가진 못할 것이다. 충분히 예방조치를 취하면 무탈하게 다닐 수 있다. 겁내고 공포스러워하다 보니 좋은 것들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얼마전엔 동학사와 갑사를 다녀왔다. 계룡산의 넉넉한 품과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 이는 충청도만이 제공하는 특혜인 것 같다. 조금 가물어서 수량이 줄긴 했어도 찾는 이의 귀를 청량하게 씻어주는 물소리는 듣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여유와 낭만을 안겨준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너무 코로나의 위협을 느끼고 살지 않는가 싶다. 백신을 맞고, 철저히 마스크를 쓰는 등 대비를 하고 나서면 주변 자연이 주는 선물을 풍요롭게 만끽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집에 웅크려있지 말고, 30-40분 승용차를 몰면 당도하는 충청도의 산사에 가서 여름 내내 시달렸던 몸을 추스르고 오는 것도 의미가 있어보인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산사의

서천-보령-서산-당진에 이르는 해변의 해수욕장에 가서 가는 여름을 환송하는 묘미도 살릴 수 있다.

굳이 바닷가나 산사를 가지 않더라도 세종시내에 있는 제천과 방축천을 걷는 것만으로도 사는 의미를 안겨줄 것이다. 영평사의 구절초는 9월 중순부터 꽃을 피울 것이다. 지금 푸르게 일렁이는 구절초의 구릉을 감상하는 것도 묘미가 있을 것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10분-20분 내외면 닿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그러나 가을은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나씩은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묵혀두었던 일기장을 다시 꺼내 쓰기 시작하고, 교양강좌에 등록하고, 작은 여행을 준비한다.

십수 년 전 일본의 경제지 니혼게이자이가 98세로 세상을 떠난 어느 노인의 가계부를 연재한 적이 있다. 그가 15세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가게 점원시절부터 큰 가게를 운영한 90세까지 물건 값을 매일매일 가계부에 기입하니 바로 일본 생활경제사가 되었다. 그중 주요 대목을 골라 연재한 것이다.

하루하루 일상은 무의미해보이지만 80년 동안 멈추지 않고 가계부를 쓰다 보니 어느새 일본 통산성이 밝힐 수 없는 일본 생활경제사를 집필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시시해보일지라도 이런 시시한 것도 성실하게 적다 보니 역사가 되는 것이다.

다가오는 가을, 어려운 것을 시작하는 것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나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