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에서 '전쟁의 상흔'을 찾다

[6.25전쟁 70주년 시리즈 2편] 개미고개 전투에 가린 조치원과 공주-대평리 전투 백마고지 전투 진두진휘 '김종오' 장군 출생 비밀...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도 간직

2020-06-24     박종록 기자
금강

[세종포스트 박종록 기자] 1950년 발발해 어느덧 70주년을 맞이한 6.25전쟁.

세종시 또한 충청남도 연기군 시절 그리고 현재의 장군면이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에 속하고 부강면이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이었던 시절, 이곳 주민들은 모두 전쟁의 큰 아픔을 겪었다.

6.25전쟁사에서 전동면의 개미고개 전투는 최고 격전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채 역사로만 전해오는 일화도 있다. 

조치원 전투와 공주-대평리 전투(금강 전투)도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세종시 곳곳에 6.25전쟁의 상흔을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세종시 전투의 기록은 '6.25전쟁 주요 전투1' 제목으로 담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김종오 장군과 6.25참전유공자비 및 위령비에 관한 내용은 부강면지(2015)를 각각 참조했다.

#. 조치원 전투, 4일간의 혈투

조치원읍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6.25전쟁 주요 전투1'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1950년 7월 11일부터 12일까지 있었던 전투로, 미국 제24사단 제21연대와 제34연대가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방어했다.

미 제21연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북한군의 남진을 4일간 지연시킨 전투로, 미 제21연대는 대평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할 수 있던 전투로 전해진다. 

#. 공주 그리고 대평리 전투(금강 전투)

공주 전투는 미국 제24사단 제34연대가 1950년 7월 12일부터 14일까지 금강 방어선을 편성해 남진하는 북한군 제4사단 공격을 방어한 전투다.

당시 제24사단장이었던 딘 소장이 금강선을 어떠한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고수할 것을 명령했는데, 미 제34연대는 유리한 방어배치에도 불구하고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북한군을 저지 못하고 철수, 낙동강선으로 물러서게 됐다.  

대평리 전투는 미국 제24사단 제19연대가 금강 방어전의 일환으로 1950년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대평리 일대에서 금강을 이용해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킨 방어 전투다.

그러나 이 전투는 패전사로 남아 있다. 대평리가 북한 수중에 넘어가 미 제24사단은 16일 밤 대전 부근으로 철수했다. 또한 제19연대도 제21연대와 함께 참담한 패배를 맛봤다. 

#. '백마고지 전투' 활약, 김종오 장군을 아시나요?  

6.25

6.25전쟁 당시 강원도 춘천·홍천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김종오 대장.

그는 1921년 5월 22일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외천리(현 청주시 남이면 부용외천리) 출신이다. 호는 송파. 그의 아버지 김성균은 3대 부용면장이었다.

1949년 5월 제1연대장 재직 중이던 당시 포천 북방 사직리에서 북한군 2개 중대 병력을 섬멸, 6.25전쟁 이전부터 이미 북한군과의 접전에서 활약을 시작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에는 제6사단장이었는데, 춘천·홍천 방면으로 공격해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5일 동안 방어해 지연시켰다. 이후 충북 음성에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 1000명을 사살하고 97명을 포로로 잡은 전공으로 준장 직위에 올랐다.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 10월 26일 현 북한 지역인 초산을 점령해 한만 국경에 최초로 태극기를 꽂은 인물이다.

이후 부상으로 육군본부 내 요직을 역임하다 1952년 군사분계선 획정 문제가 있을 때 전방의 제9사단장으로 임명돼 중공군을 상대로 백마고지에서 10일간 24회의 전투를 지휘했다. 그의 백마고지 전투 승리는 한국 전쟁사의 전설로 남아있으며, 이 전투에서 승리한 덕분에 휴전협상에 유리한 여건이 조성됐다.

그는 6.25전쟁 후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육군참모차장, 국방연구원장,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총장 등등의 직위를 거쳐 1961년 6월부터 1963년 6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육군참모총장 사임 후 겸임하던 합동참모회 의장으로 있다가 1965년 지병으로 예비역 전역, 1966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는 군 재직 당시 후학 양성을 위해 힘을 썼다. 우리시 부강면 부강초, 부강중, 세종하이텍고(당시 부강공업고등학교), 청주시 남이면 갈원초, 외천초(현재는 폐교), 현도면 현도중 등의 건립 및 자재 지원을 주도했다. 

2001년 5월 22일 부강초 교정에는 그의 생일에 맞춰 흉상을 세웠다. 2011년에는 김종오 장군 선양사업 추진위원회가 발족, 그의 업적을 알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또 부강면에서는 2013년부터 그의 생일인 5월 22일마다 탄신제를 거행하고 있다.

그가 제1군단장 시절 직접 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양의 가죽이 호랑이 가죽의 문채가 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한다.

한 두 성을 수복한 것은 나의 처음 품은 뜻이 아니고

자리 한 장의 좁은 땅 치안한 것이 어찌 명예 되겠는가.

조국의 어려움을 민망히 여겨

감히 이 몸을 군막에 드러내어

호적을 물리쳤으나 이 어찌 나라에 입은 은혜의 만분의 일이 될 것인가.

 

-부강면 6.25 참전유공자비-

부강면

부강면 일대 참전유공자 54인의 이름을 새긴 비석으로, 2004년 7월에 건립돼 그 해 12월 20일에 제막식이 있었다. 부강리, 산수리, 금호리, 노호리, 등곡리, 문곡리, 행산리, 갈산리(당시 연기군), 외천리(현 청주시) 등 부강면 이전 부용면 시절 6.25전쟁에 참전한 적지않은 주민들의 호국선열 정신을 기리는 자리이다.

#. 6.25전쟁의 상처 간직한 '희생자 위령비'

6.25전쟁으로

이 위령비는 6.25전쟁으로 희생된 민간인들과 유엔군 1기, 경찰관 4기, 무명용사 3기의 넋을 위로하고자 설치된 비석이다.

원래 1961년 8월 15일 당시에는 금강 너머 연기군 금남면 부용리 금강변 제방에 부강중·고등학교 명의로 작게 세워져있던 비석인데, 2008년 6월 24일 금강변에서 참전유공자비 옆으로 새 위령비를 제작해 옮겼으며 그 제막식이 거행됐다.

실제로 이 비석을 찾아갔을 때 조금 떨어진 옆에 6.25참전유공자비가 있을 뿐, 부강면지에 기록되어 옆에 묻혀있다는 이전 위령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 통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의 넋에 다시 한번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