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면 591번 지방도를 잇는 충-효-사랑

생(生)을 바쳐 아름답고, 죽음을 초월하여 숭고한 선조들의 이야기

2012-08-14     김수현

연동면 사람들에게 591번 지방도는 우리 몸의 동맥과 같은 도로다.

북으로는 조치원과 청주, 남으로는 부강을 넘어 신탄진과 대전으로 연결되는 도로다.

이 도로를 따라 연동 사람들은 외부와 소통을 했고, 외부 사람들은 이 도로를 통해 연동면을 알게 됐다.

조치원을 떠나 미호천을 건너 연동면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만나는 마을이 예양리다.

예양리에서 송용리, 내판리로 이어지는 591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아주 보기 드문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통상 도로를 달리다 보면 적지 않은 문화유적 이정표를 만날 수 있고,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이정표를 만나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591번 지방도에는 내판역을 기점으로 반경 500m 안에 ‘정려’ 이정표가 유독 밀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정표는 충신(밀양박씨 오충정려)과 효자(효자 김백열 정려), 열녀(언양김씨 정려, 광산김씨 정려, 밀양손씨·창녕성씨 양세정려)의 정려가 골고루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동면지에 따르면 정려가 많은 이유를 유학정신의 발현이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동면에 거주하는 장좌진 옹(77세, 전 연기향교 전교)에 의하면 지리적인 우연이라고 말하면서도, 연동면과 같은 좁은 지역에 정려가 밀집되어 있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답했다.

591번 국도를 따라 ‘생(生)을 바쳐 아름답고, 죽음을 초월하여 숭고한’ 선조들의 궁극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충(忠 : 아버지와 그의 네 아들 모두가 목숨을 바치다.)

충신 밀양박씨 오충정려
밀양 박씨 박천붕은 27세에 무과에 뽑혀 참군에 올랐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중붕 선생의 종사관으로 상당산성의 싸움에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워서 수십 명의 적을 무찌르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의 네 아들 원겸, 인겸, 예겸, 의겸 또한 모두 지략이 뛰어나 병자호란을 당하여 청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4형제 모두 전사하였다. 5부자의 충절을 비할 바 없으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연동면 예양리 산 21번지에 위치해 있다.

▲ 충신 밀양박씨 오충정려

효(孝 : 부모님에 대한 공경에 하늘도 울다.)

효자 김백열 정려
안동 김씨 김백열의 자는 여행이며 동면 내판리에서 태어났다. 5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지성으로 간호했다. 하루는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곶감이 부친의 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주자 다음날 이를 구하여 드리니 며칠만에 병이 나았다 한다. 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하늘에서 내린 효자라 하여 고종 27년(1890년)에 벼슬과 정려를 내렸다.
연동면 내판 2리 마을회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로 통하는 길을 ‘효자길’이라 명명하고 있다.

▲ 효자 김백열 정려

사랑(愛 : 사무치는 사랑은 절개로 피어나다.)

열녀 언양김씨 정려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씨는 83살이 된 시아버지와 아이들과 함께 피난을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 김씨는 가족들을 동문에 나가 산에 피신하게 하고 자신은 서문으로 피신하여 예양리 앞강까지 쫓기다가 오랑캐를 크게 꾸짖고 투신하여 죽었다. 이것을 본 청나라의 장수가 의롭게 생각하여 시체를 묻고 표목을 세우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 후에 쳐들어온 청의 군사들이 표목의 글씨를 보고 그 마을에 침입하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화를 면했다고 한다. 후일 남편 장응헌이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고, 난리가 끝난 후 인조 16년(1638)에 나라에서 정문 세울 것을 명했다.
연동면 송룡리 99-3번지에 위치하고 있고, 바로 아래에 ‘송용리 마애불’이 자리잡고 있다.

▲ 열녀 언양김씨 정려

열녀 광산김씨 정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여 박기정에게 출가했지만 혼례 3일만에 남편이 병을 얻어 눕게 됐다.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밤낮으로 간호하던 그녀는 허벅지살을 베어 먹이면서까지 정성을 다했지만 끝내 남편이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3년간 정성으로 시묘한 다음 당진에 사는 응현이라는 일가 아이를 데려다 양자로 삼아서 지성으로 키웠다. 이 사실이 마침 이 지방을 행차하던 도백에게 알려지게 되어 조정에 아뢰었고, 고종 14년(1877)에 우의정 송근수가 글을 쓰고 도백 민영태가 계판하여 열녀문을 세웠다.
연동면 응암리 231-1번지에 위치하고 있고, 같은 마을에는 송용리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주의 화가인 장욱진 화백의 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 열녀 광산김씨 정려

열녀 밀양손씨·창녕성씨 양세정려
손씨는 김기철의 처로서 안동김씨 집안에 출가하여 임신 7개월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손씨는 예를 다하여 죽은 남편을 섬기고 유복자를 길러서 자부로 창녕성씨를 보았지만 며느리 역시 20살이 채 안되어 남편과 사별하였다. 남편을 일찍 보낸 젊은 고부는 비통함이 말할 수 없었지만, 정절과 몸가짐이 모두 곧고 부지런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아 모범이 됐다. 이와 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고종 갑진년에 정문을 세우도록 명을 내렸다.
이 정려는 연동면 내판 3리 마을회관 도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2칸 정려로 조선조 후기의 정려 건축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 열녀 밀양손씨 창녕성씨 정려

※ 591번 지방도 이정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효자 임양문 정려’와 ‘한양조씨 정문’은 제외되었음을 양해 바랍니다.
※참고 : 조치원 문화원 발간의 ‘동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