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나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때

[고전영화의 한 장면 (5)] 한여름밤의 미소

2016-05-26     송길룡



한때 연인 사이였던 여자를 찾아가 더없이 자신을 잘 아는 친구라고 부추기며 자신의 부부생활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는 남자. 남자 입장에서야 집안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집바깥에 절친한 여자친구가 있는 셈이니 가질 건 다 가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철없고 이기적인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속맘은 어떨까? 물론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만일 식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애정이 다시금 솟아올라 불륜의 올가미에 빠져드는 것을 감수할 정도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쪽이라면?

스웨덴의 영화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한여름밤의 미소>(1955)는 전세계적으로 그에게 명성을 안겨다 준 영화걸작 <제7의 봉인>(1957) 직전에 발표된 작품으로 영화창작 초기부터 심심찮게 제작해오던 일련의 희극 작품들 중 마지막에 자리한다. <제7의 봉인> 이후로는 영화속에 철학적 고뇌를 포개넣는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인간과 신의 관계, 예술가의 실존적 의미, 여성의 조건에 대한 냉철한 탐구 등등을 주요 주제로 삼아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한여름밤의 미소>는 그 이후 다시 접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때까지 어느 정도 절정에 다다른 그의 희극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가벼운 듯 친근한 듯 경쾌하게 연출된, 동시대 미국 할리우드 희극영화와는 다른 북유럽풍의 고전적인 로맨틱코미디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중년의 변호사 프레데릭(군나르 뵈른스트란드)은 한때 사랑에 빠졌었고 나이어린 아름다운 아내와 사는 지금도 여전히 우정으로 대충 얼버무려진 애정을 품고 있는 옛날 애인 오페라 가수 데지레(에바 달벡)를 찾아간다. 그는 결혼한 지 3년째이지만 아내와 한번도 동침을 한 적이 없노라고 하소연한다. 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대해주지만 너무나 큰 나이 차이 때문에 아내는 남편으로서보다는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 프레데릭은 부부 사이인데도 부녀 사이에서의 근친상간의 금기를 느끼는 것인데 그로부터 오는 고민을 데지레에게 적나라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프레데릭의 고민상담역을 해주던 데지레는 그의 어린 아내에게 질투를 느꼈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도 철부지 같은 그의 표정에 연민을 느꼈는지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다가 불현듯 장난기어린 표정을 얼굴에 가득 채우고 자신의 나신을 그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무척 아름답고 탐스럽지만 자신에게 매혹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다. 바로 그때 그녀는 가슴에 무언가가 타오르는 것을 느낀 것일까? 프레데릭을 바로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영화 <한여름밤의 미소>의 아름다운 한 장면이 여기서 펼쳐진다. 데지레는 자신이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랑 때문에 고뇌에 빠진 옛 애인 프레데릭을 데리고 자기 집을 향해 거리로 나온다. 앞에서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노파가 호롱불을 들고 밤길을 밝히며 간다. 뒤에서 어두운 표정을 하고 따라오는 남자를 둘러둘러 뒤돌아보며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결말을 맺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그녀. 그녀는 길모퉁이 한곳에서 위로를 하는 척 예전의 한 남자에게 알 듯 모를 듯 유혹의 목소리를 실어 빙글빙글 춤추고 노래한다.

이 장면의 화면 아래에는 길가에 바짝 다가온 물의 표면이 각자의 생각에 감정이 달아오른 나이가 제법 든 옛 연인의 모습을 말없이 비춰주고 있다. 수면은 거울처럼 딴생각에 젖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눈앞 연인의 얼굴을 숨김없이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지시장치다. 그대가 나에게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그대의 수치스러운 치부를 말해주었으니 나도 역시 그대에게 나의 가려진 마음의 문을 다 열어놓고 있는 그대로 비쳐지는 나의 감정을 전해주겠어요. 이렇게 그녀의 말을 대신 전하는 것 같다.

아무것으로도 포장하지 않은 솔직함은 무뎌진 사랑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어줄까? 최소한 사랑의 출발점은 이런 때인 것 같다. 어떤 이야기로 채워지든지 그대가 나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