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타와 731부대, 피로 물든 송화강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10>천인공노할 일제의 인간생체실험

2018-04-06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장이다. 세종포스트는 전 원장이 근대도시에서 발굴한 우리 삶과 문화, 식민지 질곡의 역사적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소설 ‘마루타’의 현장인 중국 하얼빈 731부대에서 자행된 인간 생체 실험에 대해 짚어본다. <편집자 주>

 

일본제국의 야욕으로 전 세계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종전 7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상흔이 남아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살아난 민초들을 기록하는 프로젝트인 ‘대일본제국’은 200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때는 2005년, 하얼빈 731부대,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고려인, 만주지역 강제이주 조선족을 수소문해 촬영 계획을 세웠다.

연해주 촬영을 위해 해로(海路)와 육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지금은 중단된 속초항-러시아 연해주 자루비노항 노선을 배로, 러-중 국경은 버스로 넘고, 연변에서 하얼빈은 기차로 가는 루트이다.  

2005년 11월 25일 속초항에서 지인들을 만나 허름한 동춘항운 배에 올랐다. 4인실 방에 일행들이 누웠지만 배가 낡은 탓인지 엔진소리가 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매점에서 사온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서 나눠 마신 뒤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아침에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삭막한 자루비노항에 도착했다. 군항이라 사진촬영은 금지였다.

조선말까지만 해도 함북 경흥 부근의 녹둔도는 우리영토였다. 지금은 두만강 수로가 바뀌며 러시아 영토에 붙어버린 형상이다.

1860년 러-청 간 거래인 북경조약으로 러시아의 수중에 넘어갔다. 선조 때 녹둔도를 침공한 여진족에 의해 병사와 백성을 잃은 명장 이순신은 파직되어 백의종군 한다. 이후 치열한 전투 끝에 대승을 거두며 명예를 회복한다.

이러한 녹둔도의 역사는 1863년 함경도 농민 13세대가 정착하며 이어진다. 마을 이름은 ‘언덕이 있는 새로운 땅’ 지신허(地新墟)로 지었다.  1937년 1700명의 큰 마을이었지만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며 마을은 폐허가 된다.

고려인 리삼수(1921년生)는 아버지 이종택, 어머니와 함께 중앙아시아 로 이송되었다. 1달 걸린 이동 도중 죽은 사람도 많았다. 시체는 달리는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서 강냉이와 감자 등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근 40년만인 1974년 연해주로 다시 돌아왔다.

러시아회사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월급을 나눠주는 재무를 담당했다. 은퇴 후 허름한 아파트에서 실명한 부인과 거주하고 있었다. 각각 4300루블과 3700루블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한 달 생활비로 6000루블을 쓴다고 했다. 그의 딸은 우수리스크 수학선생이다.

그라스키노를 출발한 중국 훈춘행 로컬버스는 러시아 세관에서 대책 없이 서 있었다. 화물을 실은 화물차가 먼저였다.

멋진 ‘八’자 콧수염을 기르고 앞코가 반짝이는 반장화를 신은 부대장이 트럭 조수석에 올랐다가 잠시 후 내리면 졸병들이 출발시켰다. 아마 돈거래가 이뤄진 듯하다.

중국 세관은 내 대형카메라를 문제 삼았다. 수십 년 된 낡고 허름한 카메라를 트집 잡기에는 자기들도 무리가 있었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통과시켰다. 세관을 지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연변의 걸출한 사진작가이며 중국연변촬영가협회 주석인 이종걸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변에서 한국전쟁에 두 번이나 참전한 전광운 씨를 만났다. 그에게 입힐 중국군 군복을 시장에서 샀다. 도문(圖們)으로 이동해 두만강과 대안도시인 북한의 남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일본관동군 세균전 부대로 잘 알려진 731부대를 가기 위해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행 야간열차에 올랐다. 안내는 연변지역 조선족 시인인 석화. 시인과는 대전 배재대 유학시절 인연이 되었다.

앞서 장춘의 옛 만주국 시절 건축물 기록 때도 안내를 해 주었었다. 연변의 유명한 가요 ‘동동타령’은 그가 쓴 시로 곡을 만들었다.

4인실 침대 위층에 올라 잠을 청했으나 계속되는 열차의 진동 때문인지 쉽게 잠은 오지 않았다. 새벽 안내방송에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나 짐을 챙겼다. 하얼빈역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역 앞에는 오토바이를 개조한 택시들이 손님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영하 30도는 기본인지라 가뜩이나 비좁은 실내에 석탄 난로까지 설치했다. 차량 뒤 상부로 빼낸 연통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거리를 운행하는 버스의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추위로 실내의 습기가 유리창에 두툼하게 얼어 버렸기 때문이다.

731부대는 군의(軍醫)인 이시이 시로(石井)의 이름을 따 '이시이부대'라고도 부른다.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조선인과 중국인, 몽골인 등 3000명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탄저균, 페스트,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 동상실험, 탄알 관통실험 등 인간에게 행할 수 없는 실험을 자행했다.

짙은 선글라스를 쓴 1927년생 한족 손전본(孫傳本) 씨는 파란색 점퍼를 입고 나왔다. 먼저 본부 건물 앞에서 촬영했다. 다음은 보일러실 벽체 앞에 세워 놓고 촬영했다. 시인의 통역으로 고마움을 전하였다.

그는 1944년 일본군의 명령을 받은 중국인들에 의해 이유 없이 붙잡혀 731부대로 끌려갔다. 부대에는 하얼빈과 내몽골의 만주리에서 끌려온 1000명 정도의 중국인이 있었다.

60명이 생활하는 규모의 건물 23개에 분산 수용된 그들에게 전기공, 보일러공, 벽돌공, 지붕수리공의 임무가 부여되었다. 지붕수리공을 하던 손 씨는 신임을 얻어 식품조달 업무를 맡았다.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6월, 물건 구입을 위해 부대 밖으로 나온 그는 도망을 쳐 결국 살아남았다.

촬영당시 그는 하얼빈시 도리구 안길거리 9호 6-402문에 살고 있으며 노인대학에 나가 사교춤을 추며 말년을 보낸다고 했다.

손 씨가 탈출한 2달 후 일본군은 생체실험으로 끌려 온 마루타는 물론이고 입막음을 위해 그곳에서 일하던 모든 노동자를 독가스로 살해했다. 시체들은 보일러실에서 태워지거나 송화강에 버려졌다.

최근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페스트균을 배양해 길림성(吉林省)과 장춘(長春)에 퍼뜨린 뒤 주민들의 감염경로와 증세에 대한 관찰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이로 인해 중국인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940년 10월 27일에는 난징(南京)의 1644세균전 부대가 중국 닝보에 페스트균을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케 했다.

이를 실증하는 사례가 있다. 길림성 안도현 발재촌에 사는 김옥자(金玉子) 씨다. 김씨는 1932년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출생으로 10세 때 아버지 이종태와 어머니를 따라 중국 길림성 안도현으로 이주했다.

1943년부터 일본군이 동북3성에 살포한 생화학무기로 인해 온 가족이 전염병에 걸렸다. 발병 1주일 만에 모친이 사망했고 자신과 형제들은 회복되었다.

아버지 이종태는 한 달 넘게 사투하다 겨우 살아났다. 고열과 한기가 반복되었으며 구토, 갈증으로 물을 마시면 통증이 더 심했다고 한다.  이른바 ‘머저리병’으로 불리며 동북 3성에 유행했다고 한다. 

강제 이주한 김 씨와 가족사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첫째 동생 김학열은 이른바 ‘항미원조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북한에 정착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잠을 자다가 총을 든 자세로 방문을 뛰쳐나가며 헛소리를 해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다.

셋째 동생은 먹고 살기 어려워 다른 가정에 보내졌다. 30년간 연락 두절 후 소식을 접하다 2004년에 사망했다. 김옥자 씨는 강제이주와 더불어 731부대 생화학무기에 의한 2중 피해자이다.

종전 후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세균전 연구결과를 미군에 넘기는 조건으로 전범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면책되었다.

세균전부대가 개발한 생화학무기는 몇 년 뒤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쓰여 진다. 일본군 세균전부대는 인류에 큰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종전 후 그 부대원들은 오히려 번영의 시대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