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배가 영원할 것이란 무모한 확신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9>대륙침탈의 서곡, 만주전쟁

2018-03-01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장이다. 

세종포스트는 전 원장이 근대도시에서 발굴한 우리 삶과 문화, 식민지 질곡의 역사적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일제가 중국침탈의 서곡을 울린 만주전쟁에 대해 짚어본다. <편집자 주>

만주사변과 부의황제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을 일본도 비켜갈 수 없었다. 많은 도시 노동자들이 실직했고, 굶어 죽는 농민도 많았다. 일본 정부의 무대책에 평소 불만이 많았던 군부가 목소리를 내어 만주에 대한 식민지배를 주장했다.
 
일본 관동군은 자작극을 꾸며 실행에 옮긴다. 1931년 9월 18일 밤 봉천(현 심양) 교외에서 만주철도 선로를 고의적으로 폭파시킨다. 현장에 중국 동북군 군복을 입힌 시체 3구를 두어 중국군 소행으로 몰아붙였다.

이를 구실로 봉천시를 비롯해 만주철도 노선의 주요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9월 21일에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인 하야시 센주(林銑十郞)로 중장이 군대를 이끌고 독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전선은 남만주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듬해 일본은 중국인들의 반감을 줄이기 위해 천진에 있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만주로 데려와 만주괴뢰국의 황제로 앉혔다. 이로써 만주국의 실권을 장악했고 일본 재벌이 진출해 만주지역의 경제를 지배했다.

지금도 만주국 옛 수도인 장춘에는 당시에 건축된 수많은 관용, 군용청사가 현존한다. 이러한 규모로 도시를 계획하고 대규모 석조 건축물을 세운 것은 식민지배가 영원하다는 확신에서였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글은 단어로만 존재하는가보다. 10여년 뒤 일본의 패망으로 일본인들은 돌아가고 남은 건축물은 역사를 실증해 준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졸업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경군관학교가 장춘에 있다. 정확한 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滿洲國 陸軍軍官學校)이다. 일제가 1939년 새로운 수도 즉, 신경(新京)에 설치한 군관학교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7기생을 배출했는데 학생 구성은 일본인과 일본 점령지인 타이완과 한반도, 중국인이다. 제1기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계가 172명이다.

조선인 생도들은 일본인, 중국인보다 두각을 나타냈다. 1기 박임항, 2기 박정희, 4기 장은산, 5기 강문봉이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생은 후에 대한민국 군과 정계, 관료진출자가 많았다. 1기생 김동하 박임항 윤태일 이기건 이주일은 육군과 해병대에서 장성, 장관, 국회의원, 감사원장 등 요직을 맡았다. 누가 뭐래도 만주군관학교 출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2기생 박정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