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총알받이 조선청년 그리고 만리타향 위안부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8-2>연산공립보통학교와 전시동원

2018-01-23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세종포스트는 전 원장이 근대도시에서 발굴한 우리 삶과 문화, 식민지 질곡의 역사적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일제에 의해 행해진 강제징용, 강제노동, 강제이주, 일본군위안부, 군용기헌납 등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총알받이 훈련, 연산보통학교 학생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제국은 나이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게 했으며 일왕에 대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가마니 짜기나 퇴비증산, 모내기, 벼 수확 등 갖가지 노동에도 동원을 했다.

1945년에는 생필품과 모든 물자를 통제하고 심지어 놋그릇 수저와 같은 식기와 화로, 쇠솥 등 자잘한 쇠붙이까지 전쟁용품으로 징발해갔다.

강제징용과 강제노동

일제는 러일전쟁 무렵부터 한반도에 군사시설 구축을 시작했다. 연이은 개전을 하며 전국을 본격적으로 요새화했다.

태평양전쟁이 패전으로 기울어지면서 당시 우리민족은 갖가지 동원과 수탈에 처하게 된다. 1942년부터 선발된 징용병들은 일본과 국내외에 산재한 광산, 땅굴, 군사시설,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일본군위안부
  
1943년에는 의무병역제인 징병제, 1944년에는 학병제를 실시해 청년들과 대학생을 일본군으로 징집해 전선으로 내몰았다.

일왕의 칙령인 ‘여자정신대근로령’을 공포해 수십만의 미혼여성을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했고 일부는 중국과 동남아 전쟁터의 위안부로 보내졌다. 광복이 되면서 일부는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고향에 오지 못한 위안부도 많았다.

또한 만주지역으로의 강제이주가 한반도 전역에서 행해져 식민지배기의 민초들은 고향을 뒤로한 채 열차에 올라야만 했다.

강제이주 후 중앙아시아 이주

중국과 접경지역에서는 일제의 압제와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주한 고려인들은 마을을 형성해 정착해 갔다. 그도 잠시,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에 의해 강제로 화물열차에 실려 이동 중 추위와 기아로 사망한 사람이 속출했다. 시체는 달리는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고 한다. 
 

군용기 헌납운동

일본은 전선이 확대되자 전쟁에서 부족한 군용기 헌납운동을 일본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군용기헌납기성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반도 전역, 해외에 나가 있던 한인까지 확산시켰다.

‘1937년 일본 아이치(愛知)현 조선인들이 군용기헌납기성동맹회를 결성’, ‘1942년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청진부민호(淸津府民號) 4대를 헌납키로 결정’, ‘1942년 1월 충북 보은의 보은주조주식회사 이준(일본명:松原慶太郞)사장이 기금 1만원 납부’, ‘1941년 중국 텐진(天津)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군용기 2대를 헌납’ 등의 신문기사가 이를 실증하고 있다.

1938년 7월 9일에는 ‘충남호’와 ‘대동호’ 헌납식이 대전 목척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경성에서 2대의 비행기가 오기로 했으나 악천후로 못 왔다. 대신 날씨가 좋은 울산에서 육군군용기 1대를 출발시켜 대전 상공에서 묘기를 보였다.

이와 같이 전 국민과 친일파, 기업, 종교계, 공무원, 학생들까지 전 분야에서 착취, 모금되어 군용기를 헌납케 했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지는 1945년 5월 19일 이후 헌납기 행사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