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 입고 칼 쥔 일본인 교사, 살벌한 식민교육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8-1>연산공립보통학교

2017-11-24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이번에는 일제의 식민교육 역사 현장을 다녀왔다. 연산공립보통학교에서다. <편집자 주>

연산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

일제는 대륙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한다.

그 기저에는 한국인에게 저급한 보통교육만 실시해 일본제국에 충성하고 복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고, 국어(日本語)를 보급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한국의 언어를 포함, 문화를 말살시켜 한민족을 일제에 동화시키겠다는 계산이었다.

한국역사 과목은 아예 제외시켰다. 실업교육도 추진했는데 일제의 산업에 필요한 하부 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일제의 교육 의도로 1912년 전통도시 연산에 공립보통학교가 4년제로 개교했다. 1916년 3월 첫 졸업식에서 15명이 배출되었고 후에 6년제로 개편됐다.

1회 졸업생 도동희(都東熙)는 1904년생으로 학교 앞 연산천 건너 관동리 출신이다.

1920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당진군에서 11급으로 공무원을 시작했다. 연기군, 대전군, 천안군에서 차례로 근무하다 1938년 고향인 논산군에 부임해 근무했다.
 
역시 1회 졸업생인 연산면 고양리의 김유현(金裕鉉)은 1926년부터 다음해까지 연산면장을 지냈다. 재임 시 연산공립보통학교 증축공사에 1만원을 기탁해 그의 지극한 모교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1회 졸업생 송인승(宋寅昇)은 1924년 은진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시작했고, 1952년에 은진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연산공립보통학교 교사들

카츠라기(葛城言造)는 1916년 부임해 학교 내에 설치된 일본인 자녀 전용학교인 연산공립심상소학교 교사로 1927년까지 근무했다.

보통학교내에 설치된 심상소학교 교육은 일본인의 우월감과 자부심을 심어주고 격이 다른 민족이며 1등 국민이라는 정신교육을 바탕으로 했다.

일본제국은 일본 섬을 안쪽 땅, 즉 내지(內地)로 칭하고 한국인을 선인(鮮人) 또는 반도인(半島人)이라 칭했다. 섬나라가 어떻게 안쪽 땅이 될 수 있는지, 당시의 전쟁의 광기에서나 가능한 억지 호칭이 아닐 수 없다.

초등교육부터 철저한 한·일 차등교육을 하면서 내선(내지인과 조선인)일체를 강조하는 이중성은 계속된다. 연산심상소학교는 1940년 연산앵목심상소학교로 개칭됐다.

1939년까지 연산보통학교 교사 명단 중 한국인 이름이 있었으나 1940년부터는 대부분 교사의 창씨개명이 이뤄졌다. 일제의 집요한 창씨개명 등살을 견디지 못했는지 이종근(李種槿) 교사만 한글 이름을 유지했다.

하지만 이듬해 교사 명단에서 한국인 교사 이름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