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조선반도 식량기지화 전략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7>마구평수리조합과 탑정저수지

2017-10-23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이번에는 일제가 조선에서 쌀 수탈을 위해 식민지 지주제의 전형으로 창설한 수리조합에 대해 살펴본다. <편집자 주>

마구평수리조합

일제가 조선을 식량·원료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중점을 둔 것은 농사개량과 관개 수(水) 확보였다.

개별 농장 단위로 농사 개량은 추진할 수 있었으나 관개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관개 수(水) 확보책으로 기존의 수리 시설을 활용하기 위해 기존의 제언(堤堰)·보(堡)를 조사한 후 보조금을 지급해 복구·수축토록 했다.

복구·수축 사업은 기존 수리 시설과 관개답(灌漑畓)을 대상으로 한 만큼 조선인 지주의 토지가 중심이 됐을 뿐 아니라 넓은 면적으로 관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방대한 천수답(天水畓)이나 황무지를 매입해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인 지주들은 새로운 수리 시설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일본인 지주들은 일제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일본의 수리 조합 조직을 본 따 수리조합 사업을 추진했다.

1945년 광복 때까지 조선에서 창설된 수리조합은 639개에 달했다. 지역별로는 전북 56개, 충남 43개다.

수리조합을 중심적으로 추진한 주체는 일본인 대지주였다. 이로 인해 수리조합 지역 내에 조선인의 토지상실과 일본인의 토지집중이 급속히 진행됐다.

수리조합지역은 식민지 지주제가 전형적으로 전개됐으며 마구평 평야가 그 실증 현장이다.  

러일전쟁 이후 마구평에 일본인 농장개설이 늘어 하마노(濱野), 고바야시(小林), 미라이(末永), 나가쓰(永津), 마쓰모토(松本), 도세키(東拓), 쿠니타케(國武), 후지모토(藤本) 등 개인과 회사농장이 존재했다.

1909년 탁지부령으로 수리법이 발표되자 일본인과 한국인 조합원 110명으로 구성된 공동수리조합 설립됐다. 마구평수리조합은 옥구서부수리조합에 이어 두 번째로 설치됐으며 충남에서는 가장 앞섰다. 

수리조합 설립은 천수답에 의존해 농사를 지으며 농사실패를 거듭하던 고바야시(小林) 농장이 주도했다. 물 공급원인 안천리에 연못을 조성하고 수로를 만들어 용수를 공급했다. 안천리 연못은 현재 탑정저수지에 수몰된 지역이다.

초기의 명칭은 연산수리조합이었으나 후에 마구평수리조합으로 개칭됐다. 조합장은 면장 조종국이 맡았고, 고바야시(小林澄), 나가쓰(永津市作), 하마노(濱野鐵藏), 임창혁(任昌爀), 김영휘(金永暉) 5명이 평의원에 선정됐다.

1940년 단층 일식 목조로 건립된 수리조합건물은 고바야시 농장자리 초입에 위치한다. 광복이후 1991년까지 논산수리조합이 사용했었다.

이후 박영규 씨가 불하를 받아 거주했으며, 멸실된 뒤 음식점이 들어섰다.

탑정저수지

탑정저수지는 마구평수리조합의 수원인 안천리 연못을 수용하며 일제강점기인 1941년 착공, 1944년 8월 준공됐다.

마구평을 포함한 논산-강경평야에 원활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제방 길이 570m, 높이 18m로 충남에서 예당저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