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후 저가로 토지 마구 사들여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6>일제의 마구평 농업경영

2017-10-12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오늘은 일본 대지주의 쌀 수탈 현장이었던 마구평에 일제가 어떻게 자국민들의 농장으로 만들었는지 살펴본다. <편집자 주>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농업경영을 목적으로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한 것은 1901년경부터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대규모로 조선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확보한 일제는 자국민들이 농업회사나 조합 등을 조직하도록 장려해 농업경영에 적극적이었다.

러일전쟁 후 불황으로 인해 지가도 하락해 일본보다 1/10~1/30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토지를 거저 주워 먹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편승해 1904년 마구평에 창설한 고바야시농장은 농장부지를 단보(약 990㎡) 당 2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매입했다. 같은 해 하마노농장이, 1905년 미라이농장이, 1906년 나가쓰농장이, 1908년 동척농장과 쿠니타케농장이 토지를 싸게 매입해 각각 설립됐다.

논산 부적면 마구평에 속속 일본인 농장이 들어서면서 일본 이주민이 증가했다.

조선 내 이주 일본인 정착은 전국 9개 동척지점에서 관장했다. 경성, 대전, 김제, 목포, 대구, 마산, 사리원, 평양, 원산지점으로 한반도 곳곳에 지점을 두었다.

대전과 충남북 이주는 동척대전지점에서 관장을 했는데 논산 마구평도 관할지였다.

1921년 동양척식㈜ 발행 이주민명부를 보면 논산에 162명의 일본인이 11차에 걸쳐 이주했다. 이는 일본도 국내의 식량과 인구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농업이민을 적극 장려했음을 말해준다.

평야에 돌출된 권위 마쓰모토(松本)농장

호남선로 곁 야트막한 언덕위에 지어진 현존하는 마쓰모토시노부(松本信夫)주택은 1934년 건축됐다.

주택은 남쪽 목조 2층 건물과 북쪽 단층 건물로 연결됐다. 목조건물 앞에는 정원과 연못이 조성됐다. 창에는 바람과 비로부터 보호해주는 아마도(雨戶)를 설치했다.

마쓰모토(松本)농장은 1904년 창설된 고바야시(小林)농장 관리자로 일하던 마쓰모토(松本信近)가 1911년 설립했다.

당시 마구평 최대 농장에서 경험을 쌓아 자신감이 넘쳤을 것이다. 제1대 농장주가 사망한 뒤 아들 마쓰모토시노부(松本信夫)가 이어서 경영했다.

시노부는 1893년생으로 가족으로는 부인(咲子), 장남(彰夫), 장녀(智芳子), 차녀(喜淳子)가 있었다. 시노부도 부친을 따라 감투를 많이 썼는데 면협의원, 마구평수리조합장, 학교조합 관리자를 지낸 마구평 유지였다.

군인출신 나가쓰가 경영한 永津농장

1906년 4월 마구평에서 농장을 시작한 나가쓰(永津市作 1871년 熊本 出生)는 러일전쟁에 참전해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1937-39년까지 마구평수리조합장을 맡았으며 그의 아들(博)도 1932년부터 10년간 조합장을 지냈다.

1931년 환갑을 맞아 아들에게 가업을 넘겨주며 은퇴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 나가쓰와 같이 군인출신이나 경찰출신도 많이 이주시켰는데 이는 조선 내 민중봉기나 치안, 정보수집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농장주택은 창업주 아들(博)이 1936년 건립한 일식 목조 두 채의 건물이다.

왼쪽의 멸실된 건물은 기역자 형태이며 정남향으로 배치했다. 서원조 양식으로 실내에 도코노마(床の間), 난간(欄干)이 설치됐다. 오랜 기간 사람이 살지 않으며 거실마루와 배면, 건물 전체가 심한 손상을 입었다. 그러다 2008년 멸실되었고 오른쪽 건물만 남아있다.

부적면에서 출생 주민 한창수(24년생)씨는 “나가쓰는 부인과 모친, 아들 2명이 거주했으며 군인 출신답게 칼을 차고 말을 탔다”고 회고 했다. “언젠가 후손들이 농장주택을 찾아와 폐허가 되어가는 집에서 기왓장을 챙겨갔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