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대지주의 쌀 수탈현장, 마구평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ㆍ米ㆍRice’] <5>논산 속 일본마을

2017-09-26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오늘은 일본 대지주의 쌀 수탈현장이었던 마구평을 답사했다. <편집자 주>

오늘날 마구평은 너른 평야 외에는 여느 시골동네와 별 다른 게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마구평 토지는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다. 일본인 농장이 늘며 심상소학교와 면사무소, 경찰지서, 우편수취소, 수리조합 등 관공서가 생겨났다.

마구평은 논산 속 일본마을이었던 셈이다.

논산시 마구평은 일제강점기 남북으로 전주와 공주길, 동서로 대전과 강경길 교차점에 위치한 교통 요지였다.

하지만 1900년 초반까지만해도 개발되지 않은 너른 황무지였다. 이에 눈독을 들인 하마노(濱野鐵藏)와 고바야시(小林山鄕)가 1904년부터 불법개간을 했다.

이에 통감부는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1905년 3만 5000원의 보조비를 세워 합법적으로 이를 지원해 준다.

마구평의 일본인 농장 개설은 1900년대에 종료되는데 이는 더 이상 매입할 토지가 남아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904년 고바야시(小林)농장과 하마노(濱野)농장, 1905년 미라이(末永)농장, 1906년 나가쓰(永津)농장, 1908년 동척농장과 쿠니타케(國武)농장, 1909년 마구평수리조합이 각각 개설되었다.

개간초기의 일본인 농장 사진을 보면 단순한 목조건물이었다. 그러나 쌀 농장을 운영하며 부가 축적된 1930년대에 건축된 건물의 규모와 형식은 이전과 다르다.

현존하는 마쓰모토(松本)농장주택은 목조 2층에 연못과 정원까지 갖추었다. 멸실된 나가쓰(永津)주택은 일식 목조로 2채가 건축되었다. 세 채 모두 서원조(書院造) 양식인데 중국, 조선에서 온 서화나 도자기, 예술품을 진열할 수 있는 공간이 갖춰져 있다. 

마구평의 대표농장 고바야시(小林)농장

고바야시(小林山鄕 1859生)는 1904년 황무지 마구평의 토지를 매입해 농장경영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채용한 관리자 마쓰모토(松本信近)와 일본인 농부들을 마구평에 보냈다. 4년 뒤, 일본 농업학교를 나온 아들 징(澄)을 보내 농장 경영에 참여시켰다.

초기에는 밭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으나 천수답의 한계인 가뭄으로 실패가 계속되었다. 이에 1909년 마구평수리조합을 설립하고, 농업용수를 끌어 와 벼 재배를 시작했다.

황무지였던 마구평에 고바야시농장을 비롯한 여러 농장 지주주택은 일식으로 건축되었다. 

여기에 농장 관리인 주택과 한국인 소작인주택이 더하며 마을을 형성하였다. 오늘날 마구평에 고바야시마을, 마쓰모토마을, 나가쓰마을, 미라이마을의 형태가 유지되고 있다.   

고바야시농장 자리는 오늘날 적산(敵産)을 이양한 부적면사무소, 농협건물과 창고, 보건지소가 사용하고 있다. 일본 패망 후 1945년 미군정이 시작되며 일본인 소유 토지와 재산이 미군정청으로 이전되었다.

이를 관리하는 신한공사가 1946년 2월 발족되었고 공공, 민간에게 적산의 이양과 불하를 하였다. 일본인 가옥과 건물을 통칭해 적산가옥이라 부른다.

적산을 이양한 사례는 또 있다. 군산 발산초등학교는 시마타니(嶋谷)농장 자리였다. 김제중학교는 동양척식농장이, 김제동초등학교는 이시카와(石川縣)농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