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찰 문화재에 침 흘린 시라이(白井)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 <4>개태사 철확

2017-09-19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오늘은 일제강점기 연산 실세였던 시라이가 눈독을 들였던 개태사의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에 창건한 절이다. 황산벌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정벌하고 숙원이던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황산(黃山)을 천호산(天護山)으로 개칭하고 절을 세웠다.

고려의 국찰(國刹)이자 왕찰(王刹)답게 문화재 또한 많다. 보물 219호인 석불입상과 주불, 오층석탑, 석조(石槽), 철확(鐵鑊)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연산 실세 시라이가 눈독을 들인 것은 철확이다.

크기부터 압도적이다. 지름 3m, 높이 1m, 둘레가 9.4m에 달한다. 절의 전성기 때 장을 끓여 수백 승려가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 두 군데나 큼직하게 떨어져 나가 아쉬움은 있지만 웅장함은 여전하다.   

시라이가 일본으로 철확을 반출하려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태사 철확에 침 흘린 시라이가 인부와 장비를 동원해 어렵사리 부산항까지 갔다. 그런데 솥에서 3일 밤낮으로 소리가 나 인부들이 말렸다. 욕심을 부린 시라이가 화물선에 억지로 올리려 하자 천둥번개가 쳤다. 시라이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

벼락과 시라이의 죽음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시라이가 고려 국찰의 문화재를 반출하려 시도했을 가능성은 커 보인다. 당시 일본인 지주들은 농장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뒤 문화재를 사들여 소장과 판매를 해 이익을 극대화했다.

군산에는 실패한 문화재 반출 현장이 지금까지 잘 보존돼 있다. 현재의 발산초등학교다.

지금의 학교 자리는 시마타니(嶋谷八十八)가 개설한 농장이었다. 그는 조선의 사찰과 민간에서 수집한 수많은 문화재를 자신의 쿠라(倉)와 마당에 보관한 뒤 일본으로 반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자 수집한 문화재를 보낼 수 없었다. 해방이 되어 시마타니 농장에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서고 학교 후원은 옥외 박물관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개태사 철확은 그 크기와 위용을 자랑하며 경성박람회에 전시됐고 그 후 경성박물관에 보관됐다. 연산번영회가 조선총독부에 진정해 기차 편으로 연산역에 갖다 놓은 것을 해방 후 연산공원으로 옮겼다.

철확의 귀환을 위해 개태사가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81년 6월 충남문화재위원회가 연산공원에 있던 솥을 원래 있던 절로 옮기라고 승인했다. 주민대표와 신도대표가 합의해 그해 8월 22일 제자리로 옮겨 놓았다.
 
철확이 있던 연산공원은 연산면사무소 뒤에 위치한 야트막한 야산이다. 초입에 거북모양 비석받침 위에 일제강점기에 새긴 비문이 얹혀 있다. 비 뒷면은 일부가 파여 있어 판독이 불가능한데 훼손된 높이로 보아 두 글자 정도 새길 수 있다.

남아있는 글자는 2년 5월 1일이다. 추정컨대 누군가 일제강점기 피해의식의 발로로 일본연호를 지운 것 같다.

일본인 가운데 시라이(白井)가 1907년 연산에 처음 정착했음으로 이후 시기는 대정(大正)2년 1913년과 소화(昭和)2년 1927년이다. 공원 조성연도는 둘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