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 초입 위압적인 일식건물과 아련한 기억들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쌀·米·Rice’] <2>연산면 시라이상점-연산양조장-연산역급수탑

2017-09-06     전재홍

우리나라의 근대도시는 일제강점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근대도시를 답사하고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건축공학박사인 전재홍 근대도시연구원 원장이다. 지난 주 <일제 쌀 수탈과 논산평야의 눈물>이란 제목 아래 충남 논산에서 시작된 전재홍의 근대도시답사기. 오늘은 논산시 연산면 시라이 상점과 연산양조장, 연산역급수탑을 답사했다. <편집자 주>

시라이(白井)상점

시라이(白井)상점은 일본인으로서 연산지역에 처음으로 이주한 시라이가 중심지에 일본산 자재로 건축한 일식 목조건물이다.

연산장 초입에 들어선 2층 규모의 위압적인 건물이었다. 식민지배기 장을 오가며 시라이상점을 바라보는 조선농민과 민중들은 과연 어떤 생각이었을까?

시라이는 이 건물에서 학용품 매장과 일본교과서 대리점을 겸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시에는 연산중학교 교사로도 쓰였는데 1층은 교실, 2층은 교무실로 사용했다. 이후 30년간 명출사진관으로 사용됐고, 이후 동물약품 가게로 쓰이다가 2010년 쯤 멸실됐다.

민중봉기에 참여한 조선인 토벌에 앞장 선 시라이는 헌병대와 적극 협력하는 등 악행을 저질러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행적으로 볼 때 많은 조선인들로부터 원성을 살만했다.

그러나 연산일본인진흥회 등 각종단체의 회장을 맡으며 기세등등한 연산 실세여서 그에게 대항하기란 역부족이었을 것 같다.

연산양조장

연산양조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영업했다. 현재 건물은 1961년 신축됐다. 연산장에 건립돼 소주, 정종, 막걸리를 제조했다.

지붕재료는 기와였으나 후에 슬레이트와 함석으로 교체됐고 벽 소재는 흙벽돌이다. 바닥도 흙으로 마감했다. 지붕 열 차단을 위해 천정 단열재로 왕겨를 사용했다. 건물 왼쪽 창고는 철거돼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일부 양조시설과 굴뚝이 남아있다.

양조장은 논산출신으로, 논산에서 3선 민의원을 지낸 ○○씨가 일제기부터 경영했었다.

인산죽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의사 김일훈은 자신의 저서 <신의원초(神醫原草)>에 막걸리 선거를 풍자하기도 했다.

“절대 한국에서는 민주주의 못한다. 막걸리 한 사발 내지 못하면 국회의원 왜 나왔느냐.” ○○이라고 양조장하는 자인데 연산양조장, 방여헌이 하고 붙었는데. 뱃심이 두둑해요, 그 친구가 가서 그런 소릴 해. 다른 데 막걸리 수천 통 사다가 막 퍼먹였거든. 자기 거는 마지막에 쓸라고 남겨두고 다른 양조장 걸 계속 사다가 퍼 먹이는 거라. (신의원초 160쪽)

 

연산역급수탑

연산역급수탑은 일제가 한일합방 1년 후인 1911년 7월 11일 대전역에서 목포까지 호남선을 개통시키며 12월 30일 축조했다.

급수탑의 용도는 수증기의 힘으로 동력을 얻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로 전국의 주요 역에 설치됐다.

열차도 신구의 교체가 이뤄지며 증기에서 디젤로 대체된다. 그 효용을 잃어가며 1970년대까지 겨우 버티다 퇴장했다.

나이 1세기를 훌쩍 넘긴 연산역급수탑은 현재 선로 밖으로 쫓겨난 신세다.

그러나 현존하는 급수탑 가운데 가장 오래됐고 화강석을 쌓아 첨성대를 닮았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등록문화재 제48호로 지정돼 그나마 덜 섭섭하다. 높이는 16.2m, 바닥면적 16.6㎡, 용량은 30t이다.

일제기 연산역에 정차한 증기기관차에서 여객의 승‧하차가 이뤄지고 급수를 위해 10-30분가량 정차하곤 했다. 이때 열차에 올라 여행 중 식사를 해결하기 위한 승객에게 김밥을 파는 ‘연산김밥장수’가 등장했다.

이와 오버랩 되는 나의 어린 시절 기억. 부산행 완행열차를 타고 가다보면 대구 부근에선가 빨간 망에 넣은 능금을 팔았던 기억이 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