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항해, 세계 주도권을 바꾸다

[김형규의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 <9>백인우월주의의 원조 에스파냐에 가다

2017-08-23     김형규

일이 커졌습니다. 미국 남부 답사로는 세계사를 들여다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스페인으로 날아갈 수밖에요. 스페인에서 콜럼버스의 족적을 찾아보고 간 김에 산티아고순례길을 자전거로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예상대로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서 크게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콜럼버스 탓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좋은 일만 시켜줬으니 애증이 교차하겠지요.

스페인을 다녀온 후 몇 가지 의문을 추적하게 됐습니다. 15세기 세계의 육지와 바다를 호령했던 중국은 왜 항로개척을 중단했는지, 뒤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세계 식민지를 양분하다 쪽박을 찼는지 등등.

자전거 선수들은 레이싱 중간에 선두로 나서길 싫어합니다. 선두는 바람의 저항을 온몸으로 받아 체력이 남들보다 일찍 소진됩니다. 앞서가는 선수들 덕분에 뒤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바람의 저항을 훨씬 덜 받으면서 여유롭게 뒤쫓아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앞자리에 나서길 거리끼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선수들은 공평하게 번갈아가면서 앞자리에 섭니다. 아껴둔 체력은 골인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한꺼번에 방출합니다.

15세기까지 세계 강국은 중국이었습니다. 중국은 화약과 나침반, 종이를 발명할 정도로 세계문명을 주도합니다. 대다수 주변국이 조공까지 바치니 스스로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 떵떵거렸습니다.

중국 명나라 환관이자 항해가였던 정화(鄭和‧1371-1433)는 거대 함대(알려진 바로는 배의 규모가 너무 커 신빙성에 의문이 감)를 이끌고 7차에 걸친 원정항해 길에 나섭니다. 그가 다녀간 나라만해도 태국, 인도 캘리컷, 스리랑카, 페르시아 호르무즈, 아덴, 소말리아 모가디슈, 케냐 몸바사에 이릅니다.

중국 정화의 해양원정이 계속됐다면

정화는 1433년 7차 원정길에서 병을 얻어 죽게 되고 중국은 더 이상 해양원정길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해양원정을 할 만큼 궁핍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희망봉에 도착하고 에스파냐의 후원을 얻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세계 주도권은 요동칩니다.

중국이 대항해를 지속했다면 세계판도는 어떻게 됐을까요.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은 종교전쟁과 내분, 이웃나라와의 잦은 전쟁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해 바다 밖으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었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정화는 원정도중 여러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강압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평화로운 방법으로 상대국을 굴복시키고 교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럽의 열강들은 무력에 의해 식민지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무참히 제거했습니다.

유럽의 어수선한 분위기와는 달리 비교적 일찍이 안정적인 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이베리아반도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입니다. 이베리아반도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작은 나라 포르투갈에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열망에 가득 찬 엔히크(1394-1460) 왕자가 있었습니다.

인도에 있는 후추와 향신료, 금을 얻으려면 동쪽 육로로 에스파냐를 거쳐 많은 이슬람국가를 거쳐야 했습니다만 적대적인 국가가 많아 불가능했죠. 엔히크 왕자는 ‘육로가 안 되면 바다로 가면 되지’라는 집념으로 조선과 항해술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선박이 카라벨선입니다. 이때부터 맞바람에도 전진할 수 있는 돛과 항해술이 등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엔히크 왕자는 정화의 정크선 제작기술과 항해술을 이슬람을 통해 전수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베리아반도, 세계 판도를 바꾸다

정화나 엔히크의 함선은 육안으로 육지를 보면서 항해를 했습니다. 아직 나침반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먼 바다에서는 방향을 잡기 어려웠으므로 뭍을 확인하고 자주 상륙해가면서 보급을 받는 형식으로 조금씩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내려갔습니다.

엔히크는 인도로 가는 항로는 개척하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의 금, 상아, 노예 등을 팔아 큰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본 많은 포르투갈 청장년들이 앞 다퉈 바다로 나갔습니다. 지금 다른 나라에 비해 아프리카 계열 포르투갈인이 많은 이유는 당시 배를 타느라 부족했던 남성의 역할을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노략질과 노예무역은 수세기 동안 유럽 열강과 미국, 일본에 까지 선례로 남아 지금껏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은 자생력을 갖춘 산업기반 없이 다른 나라의 수탈에만 주력한 나머지 결국에는 열강의 경쟁 대열에서 뒤처지고 맙니다. 최근에는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유럽에서 가장 쪼들리는 나라로 남게 됩니다.

포르투갈과 이웃한 나라 에스파냐는 1479년 무슬림의 통치에서 벗어나 통일을 이루고 자체 왕조를 성립합니다. 나라의 안정을 되찾고 주위를 살펴보니 포르투갈의 약진이 장난 아니게 보입니다. 별반 투자 없이 금과 은, 노예들을 마구 들여오니 에스파냐 입장에선 군침을 흘릴 수밖에요.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입니다.

콜럼버스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두 나라에 자신의 항해 프로젝트를 제안합니다만 당시 잘나가던 포르투갈에는 퇴짜를 맞고 에스파냐 이사벨여왕의 후원을 받아 항해 길에 올라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무적함대’ 에스파냐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콜럼버스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서쪽으로 원양항해를 감행해 카리브해에 도착했다는 점에서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콜럼버스는 이때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았고 아프리카의 카나리아해류를 이용해 서진하는 방법을 깨우쳤으며 무역풍과 편서풍, 해류의 흐름을 파악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포르투갈‧에스파냐의 황당한 식민지분할

바다 밖에서 위세를 떨치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식민지 확장을 놓고 곳곳에서 갈등을 빚게 됩니다. 결국 교황의 중재 아래 1494년과 1529년 두 차례에 걸친 조약으로 세계를 양분해 나눠 갖습니다. 이때 기준 경도가 브라질 국경입니다.

브라질은 지금도 포르투갈계열이고 나머지 서쪽은 에스파나 계열입니다. 또한 브라질은 사탕수수, 커피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운영하느라 아프리카 노예를 많이 받아들여 대다수 국민들이 물라토(mulato)화됐습니다만.

아르헨티나‧우루과이와 같은 스페인 계열 국가는 소수이민자들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목축업에 종사해 백인이 많습니다. 스페인은 땅덩어리가 넓어 목축을 많이 합니다. 물론 백인 이민자들이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변방으로 몰아낸 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식민지 분할방식은 이후 다른 제국주의의 식민지 국경선 획정방식에 모델이 됩니다. 세계를 주름잡던 에스파냐도 영국과의 한판 승부에서 패하고 안방이나 다름없던 아메리카에서도 뒷전으로 밀려나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탐욕은 뒤이어 바다로 눈을 돌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일본 등에 잘못된 선례를 남겨 전 세계에서 제국주의 식민지정복과 수탈이라는 만행이 자행됩니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의 탐욕을 감추기 위해 복음이니 백인우월주의니 대동아공영론이니 하는 터무니없는 이론을 들고 나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