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변주 ‘인펀덜트(Infandult)’

나광호 ‘Amuseument’展, 15일까지 세종포스트빌딩 5층 청암아트홀

2017-08-01     이충건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인데…. 맞아, 헬가! 한참이 지나서야 화폭 속 인물이 떠올랐다.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의 ‘프러시안(The Prussian).’ 와이어스는 헬가 테스토르프(Helga Testorf)라는 여인을 모델로 24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림은 와이어스의 작품을 다시 그린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인물묘사가 전혀 딴판이다. 명화 속 모델을 다시 그린 셈인데 기법 자체가 판이하다. 단순히 수채화가 유채화로 바뀐 것 이상이다. 누군가 ‘장난질’이라고 따질 법도 하다. 그도 그럴것이 와이어스의 걸작을 아이가 본떴고, 화가가 이를 다시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주했기 때문이다. 아이와 화가의 협업인 셈이다.

주로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화가 나광호의 개인전 ‘Amuseument’가 세종포스트빌딩 5층 청암아트홀에서 1일 개막했다.

15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는 ‘헬가’를 비롯한 35점이 선보인다. 전시명 ‘Amuseument’는 재미, 놀이를 뜻하는 ‘어뮤즈먼트(Amusement)’와 미술관 ‘뮤지엄(Museum)’을 결합해서 지었다. 한마디로 ‘재미난 미술관’이다.

누군가 ‘명작을 가지고 장난하느냐’고 묻는다면 전시명에 그 답이 있다. 맞다. 나광호는 그림을 놀이로 여긴다. 명화를 보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하는 게 그가 요즘 천착하는 작업이다.

아이들의 시선과 직관을 차용하는 작가의 자세는 진지하고 성실하다. 원작에 한참 못 미칠 정도로 어긋난 서툰 선까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작가가 믿고 있어서다. 역시 와이어스의 명화인 ‘과수원에서(In Orchard)’도 아이와 화가의 협업으로 재탄생했다. 나무와 배경의 유려함과 달리 헬가의 얼굴모습이 일그러져보일 정도로 어설프다.

가장 장난스러운 작품은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Straw Hat)’이다. 고흐는 이 그림을 여러 개 남겼는데 아이가 모사한 작품은 1887년작 디트로이트미술관 소장품이다. 딱 아이가 묘사할 수 있는만큼의 사람얼굴이다. 그런데도 그림을 보면 정확히 고흐의 자화상이 연상된다. 이 그림을 보고 고흐의 걸작을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나기 마련이다.

전시에서는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 존 싱어(John Singer), 앤디 워홀(Andy Warhol)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도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위대함, 명성, 높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모방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화가 가능한 흉내 내는 놀이, 혹은 새로움을 표방한 엉터리 흉내 내기”라고 말한다. 미술평론가 홍경한은 이를 ‘인펀덜트(Infandult)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위대한 작품이 갖는 절대성과 아이들의 모방, 또 모방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화가 나광호의 작업. 이 연속성은 가치의 높음과 낮음, 중심과 주변, 예술과 장난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명작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변주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SF(사이언스픽션)소설이나 무협소설이 문학의 장르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