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의 재즈와 한국의 사물놀이

[김형규의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 <5>루이 암스트롱에서 찰리 파커, 김용배까지

2017-06-26     김형규

뉴올리언스에서 재즈는 일상이 아닌 관광 상품이 됐습니다. 다운타운은 경기 위축으로 재즈뮤지션의 설자리가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관광지나 대형 호프집에서나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재즈를 들여다보면 뉴올리언스의 독특한 향토문화인 ‘크레올’과 ‘케이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크레올과 케이준은 미국 역사 초기에는 계급차별적인 용어로 쓰였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서얼쯤으로 이해됩니다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독특한 문화의 개념으로 바뀝니다.

크레올과 케이준에 대한 서글픈 역사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재즈에 대한 이야기부터 풀어보기로 하죠.

‘스캣’ 창시자 암스트롱

음악으로서 재즈는 너무 방대하므로 독자의 취향에 맡기고 곧바로 루이 암스트롱(1901-1971)으로 넘어가겠습니다.

‘What a wonderful love’로 대표되는 암스트롱은 흐느적거리는 스윙 리듬으로 전 세계 대중음악의 방향을 바꿔 놓습니다.

암스트롱은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뉴올리언스 집창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죠. 이웃들의 한탄이나 노동요, 아프리카풍의 리듬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겁니다.

뜻을 세운 그는 집을 뛰쳐나와 트럼펫 연주에 혼신을 바칩니다. 선천적 음악성은 현란한 트럼펫 연주나 아랫배로부터 끓어오르는 굵은 목소리에서 드러나지만 음유시인을 연상케 하는 ‘스캣(scat)’을 무대화 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습니다.

요절한 천재 뮤지션 찰리 파커

암스트롱이 주축이 된 재즈가 뉴올리언스를 벗어나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 무렵 새로운 기수가 등장합니다. 비밥의 원조 ‘찰리 파커’(1920-1955)입니다. 천재적인 색소폰연주자 파커는 캔자스시티 출신이지만 기존의 끈적한 재즈풍에서 벗어나 템포가 강한 음악을 추구합니다.

암스트롱의 재즈가 원초적이라면 파커의 재즈는 예술성과 기교를 중시했다고나 할까요. 밑천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즉흥연주 능력을 중시하기도 했죠. 암스트롱의 스캣을 비밥으로 승화시킨 건데 우리 국악 ‘시나위’와 비견됩니다.

파커는 술과 마약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사망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빠르게 천부적 재능을 비워낸 탓일까요. 술과 마약의 힘으로 음악적 빈 공간을 대신하려 했지만 오히려 영혼은 더욱 썩어들어 갔던 거죠. 그의 음반은 지금도 재즈 연습생에게 교과서로 통합니다.

1978년 2월 서울 공간사랑의 소극장으로 장면이 바뀝니다. 김덕수 김용배 등 4명의 남사당패 후예들이 ‘사물놀이’라는 천지를 뒤흔드는 공연을 선보입니다.

서양문화와 왜색문물이 넘쳤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사물놀이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타령조의 국악이나 뽕짝에 한계를 느꼈던 젊은이들에게 우리 전통에도 신명이 있다는 걸 입증한 겁니다. 이후 각 대학에는 사물놀이패가 선풍적인 인기를 끕니다.

전통음악의 혁명 사물놀이

사물놀이 원조급 4인방은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로 고착이 돼 각자 국악계의 대들보로 성장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사물놀이는 전통음악이 아닙니다. 네 명이 각자 어려서부터 체득한 예능을 마당이나 들판이 아닌 실내공간에서 의기투합한 ‘창의적 놀이’입니다. 몸으로 익힌 예능이기에 이들에게 악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김덕수의 장구, 김용배의 꽹과리 두들기는 장면은 영화 위플래쉬의 드럼 연주장면을 연상케 했다고 합니다. 멜로디가 없는 타악기의 조합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리타분한 전통예술을 새롭게 구성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예술사의 중요한 사건이라 할 만합니다.
   
김덕수(대전), 박용배(충남 논산), 이광수(충남 예산), 최종실(경남 사천) 가운데 3명이 충청도 출신입니다. 조선시대 소리꾼 등 국악인물을 보더라도 충청도 출신이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전국의 들판이나 시장에서 이뤄지는 농악을 사물놀이라는 무대음악으로 승화시켰듯이 살풀이, 승무, 태평무 등 전통무용을 야외에서 실내무대로 집대성한 명인도 충남 홍성 출신의 걸출한 고수 한성준(1874-1942)입니다. 영호남과 경기도의 민속예술을 중간지점에서 고루 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천재성 뒤엔 끊임 없는 노력이

1980-1990년대 사물놀이는 민주화운동에 힘입어 자생적인 후진 배출과 재즈, 클래식과의 퓨전합동공연 등을 기획하면서 세를 확장합니다만 지금은 모색기에 접어든 듯합니다. 한국의 전통음악이 무엇인가라는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1986년 4월 당대 최고의 ‘뜬새’ 김용배(1953-1986)는 33세의 아까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자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음악적 고독도 작용한 듯합니다.
     
파커와 김용배에 주목하는 이유는 당대 저급문화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대중적인 관심을 이끌었다는데 있습니다. 자신이 체득한 음악을 재생만하지 않고 즉흥음악이란 창의성을 보여줬다는 점이죠.

즉흥음악을 위해 파커와 김용배는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파커는 사후에도 영화 ‘위플래쉬’와 ‘버드’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등 재조명이 이뤄지지만 김용배는 점점 기억에서 잊히고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