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불면 허무하게 지는 꽃 '아네모네'

[박한표의 그리스

2017-05-25     박한표

옛날 소아시아의 작은 왕국에 테이아스라는 왕이 있었다. 이 왕의 왕비는 딸을 하나 참하게 길러놓고 입버릇삼아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아름답다고 한들 설마 우리 스미르나만 할까?” 아프로디테가 그 소리를 듣고 질투를 느꼈다. 신과는 비교하지도 말고, 감히 경쟁하지 않아야만 한다. 신은 불완전한 인간의 오만을 싫어하고 벌한다.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시켜 스미르나에게 화살 한 방을 쏘게 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에로스에는 두 종류의 화살이 있다. 금 화살과 납 화살이다. 금 화살을 맞으면 처음 보는 이성을 사랑해야 하고, 납 화살을 맞으면 처음 보는 이성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에로스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스미르나에게 금 화살 한 대를 날렸다. 불행하게도 그 화살에 맞은 스미르나가 처음 본 이성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향한 딸의 상사병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갔다. 유모가 사정을 눈치 채고, 왕에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게 한 뒤 그 딸을 침대로 들여보냈다.

 

 

그 이후, 스미르나의 몸속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왕은 딸을 불러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다. 딸은 “아기의 아버지가 곧 아기의 외조부”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이해한 왕은 창피하고 분한 마음에 칼을 뽑아 딸을 찌르려고 했다. 아비의 칼에 죽음을 당하기 직전 아프로디테 여신은 아비의 씨를 받은 딸의 몸을 몰약나무(향나무)로 바꾸었다. 그래서 몰약나무를 스미르나라고 한다. 달이 찬 후, 이 몰약나무에서 나온 아이가 그 유명한 그리스 신화의 꽃미남 아도니스다.


이 아이를 꺼낸 이가 아프로디테다. 그는 아이를 상자에 넣어 “상자를 어두운 곳에 두되 열어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쓴 쪽지와 함께 저승의 왕비 페르세포네에게 보냈다. ‘절대’가 붙으면 그 금기는 깨지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저승의 왕비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를 열었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신인 아프로디테는 다른 신들이 이 귀여운 아이를 못 보게 하려고 상자에 넣어서 지하세계의 여주인 페르세포네에게 맡겼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세포네 또한 아도니스의 매력에 반해 곁에 두고 몹시 귀여워했다. 이를 알게 된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돌려 달라고 했으나, 페르세포네가 순순히 돌려줄 리가 없었다. 결국 아도니스를 둘러싼 두 여신의 싸움이 일어났는데, 이를 지켜보던 제우스가 중재에 나섰다.

 

 

중재의 결과, 아도니스는 1년 중 1/3은 혼자서 자유롭게 지내고, 다른 1/3은 페르세포네와 지내며, 나머지 1/3은 아프로디테와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도니스는 허락받은 자유의 시간에도 아프로디테와 함께 지내며 여신의 사랑을 받았다. 지하세계의 페르세포네보다는 아름답고 관능적인 아프로디테와 지내는 것이 더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가 함께 지낸 시간은 짧았다. 아프로디테가 잠시 올림포스에 올라간 사이, 아도니스는 사냥을 하던 중 멧돼지에게 물려 생명을 잃었다.


잠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1890) 속 아도니스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구조다.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던 아도니스는 사냥 중에 멧돼지에게 받쳐 죽는다.

 

아프로디테의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저승의 신들이 아도니스가 1년의 반은 저승에서 지내고 반은 이승에서 미의 여신과 지내도록 허락했다. 이렇게 이승과 저승을 왕복하는 아도니스는 프레이저에 따르면 매년 늦가을에 죽었다가 봄이면 소생하는 식물과 곡물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아도니스가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정화되어야 자연의 생명력도 싱싱하게 부활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도니스의 죽음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프로디테는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소식을 들은 아프로디테는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여신은 아도니스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에 신의 음료인 넥타르를 뿌리면서 그를 추모했다. 여기서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아네모네이다. 바람이 불면 지고 마는 허무한 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바람꽃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도니스의 너무나도 덧없는 일생과 꽃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렸다.


아도니스의 곁으로 사나운 멧돼지를 보낸 것이 아프로디테의 애인 아레스였다고도 하고, 또는 수렵의 여신이면서 순결한 처녀신인 아르테미스였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