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빚는 유년의 기억, 전의면 가느실길 풍경

[인터뷰] 도예가 천영옥

2017-05-15     한지혜 기자

[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흙, 돌, 나무, 풀, 새…. 고향과 유년에 대한 기억은 국가와 나이를 초월한다. 기억은 1250도 뜨거운 가마를 거쳐 다시 도자기 작품으로 박제되기도 한다.

세종시 전의면 가느실길 풍경을 작품에 담고 있는 천영옥 도예가를 만났다. 카페를 겸한 작은 전시 공간. 이 특별한 전시는 세종시청 인근 정경아 갤러리에서 오는 31일까지 열린다. 

매주 월요일 세종시 조치원읍 평리 할머니들을 만나고 있는 천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더 특별하다. 그를 만나 지난해부터 진행해온 평리 도자기 수업과 최근 설립된 세종시공예조합에 대해 들어봤다.

세종시 전의면 가느실길 ‘이랑’, 유년의 기억 작품에 담아


천 작가는 전의초와 전의중을 졸업하고, 충남 천안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 서울에서 대학원을 마쳤다. 작가로서 꿈꿔왔던 노천소성(露天燒成) 작업은 서울에서는 마땅치 않았다.

결국 부모님이 있는 고향 땅이 그의 작업실이 됐다. 14년 전 작은 컨테이너를 마련, 고향에서 결혼, 출산, 육아를 겪었다. 두 자녀 역시 그의 모교에 재학 중이다.

천 작가는 “서울에서도 항상 작업 소재는 어릴 적 유년시절의 것들이었다”며 “흙, 풀, 나무, 동물 등 자연 그대로의 소재는 오히려 국가와 나이를 초월하는 이야기임을 느꼈다”고 했다.

한때는 문화예술과 동떨어졌던 작은 시골 동네의 삶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도시의 삶을 모른채 상경해 스스로 작아질 때도 있었지만, 결국 유년의 이야기가 바로 인간 삶의 기본 바탕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공방 이름 ‘이랑’의 의미는 밭의 고랑, 이랑에서 따왔다”며 “물이 빠지도록 움푹 들어간 곳이 고랑, 작물이 자라는 높은 곳이 이랑인데, 보통 이 세트를 이랑이라고 부른다. 작물이 잘 크기 위해서는 같은 넓이의 고랑이 있어야 하듯이 내가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들고, 어두운 부분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천 작가는 보통 작업실 근처 작은 동산을 오가다 보는 식물을 스케치해 작품에 담는다. 예를 들면, 산책길에서 만난 측백나무 가지를 손으로 그려 1250도 고온에서 구워 표면에 광물질을 사용해 전사하는 방식이다. 

시리즈 작품인 ‘꿩’의 깃털이 새겨진 머그컵에는 직접 겪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꿩을 사냥한 매가 그의 집 마당 위를 날아가다 사냥감을 떨어뜨렸는데, 천 작가가 우연히 이를 발견한 뒤 탄생한 작품이다. 

그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채 피도 흐르지 않는 깨끗한 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양한 깃털의 모습이 보였다”며 “꿩 한 마리가 가진 깃털, 그 제각각의 모습을 스케치해 작품에 새겼다”고 설명했다.

조치원읍 평리 할머니들과의 인연, 창업 도우미 역할도

카페를 겸한 전시 공간 한 쪽에는 다육 등 작은 식물이 심어진 화분을 만날 수 있다. 푯말에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만든 기업에서 함께 만들고 심었어요’라는 문구가 써져 있다. 

천 작가가 80대 할머니들을 만나게 된 건 문화관광부 지원으로 시작된 평리 문화마을 조성사업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프로그램 중 하나인 도예 수업을 진행하면서 지난해 주민들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 매 주 월요일마다 60~80대 할머니 15여 명이 이 수업을 듣기 위해 모이고 있다.

천 작가는 “수업 첫 날 손을 풀어보는 의미로 흙으로 어렸을 적 먹었던 음식을 만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며 “생각지도 못했던 음식 이야기가 나오고, 언제, 어떻게 먹었는지 사연이 술술 흘러나왔다. 어린아이 소꿉장난 같은 그릇들이 충분히 작품이 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회상했다.

눈이 침침하고, 허리가 아프고, 손이 무뎌져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 지레 겁먹던 할머니들은 어린아이같이 수업에 임했다. 첫 수업 날 생긴 원동력은 이듬해 창업에 대한 열망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도예 수업을 진행 중인데, 주민들이 창업을 원해 작품을 상품화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재정비했다”며 “지금은 6월 24일 마을 장터에 내놓을 작품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미 문화마을 사업을 통해 꽃길 만들기 마을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었다. 화분이라는 아이템이 마침 잘 맞아 떨어진 셈. 그럴듯한 완성품에 어울리는 식물까지 심으니 자신감이 생겨 할머니들은 창업가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세종시공예협동조합 설립, 올 6월 공예품경진대회 개최

최근 세종시공예협동조합(이사장 이상희)이 설립됐다. 천 작가는 현재 세종공예협동조합 이사직을 맡고 있다. 도자기, 섬유, 금속, 목공예 등 일부 작가들을 포함, 공예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업자들이 함께 참여했다. 

연기군 시절 충남조합에 속했던 세종은 조합 설립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시 출범 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조합 설립은 여전히 요원했다. 40년 역사의 전국대회 출전을 위한 지방대회도 열리지 못했다. 대회 주최 자격을 가진 곳이 조합이었기 때문.

그는 “작가들은 조합 가입이 불필요하고, 굳이 만드는 데 참여할 필요도 없지만, 누군가 만들길 기다리다간 안 되겠다 싶어 이상희 이사장님과 조합 설립을 준비했다”며 “협회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공예품경진대회 세종 지방대회는 올 6월 개최된다. 전국대회가 7월에 열려 굉장히 촉박한 상황이지만, 내년에는 관광상품대전 등 총 2개 대회를 추진할 예정이다.

조합 출범과 함께 세종에서 활동 중인 다양한 공예가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주기적으로 열리는 세종시 프리마켓 행사에서 자신만의 공예품을 선보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  

천 작가에 따르면, 세종시에 이주해 우울증을 겪거나 육아에 매진하면서 취미로 공예를 시작, 1인 창업으로까지 이어진 경우도 있다. 조합의 역할 중 하나는 바로 이들을 활성화 하는 데 있다.

천 작가는 “세종시에서 사업자로 활동 중인 여성들의 경우 대회 등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를 직업화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사업화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고,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일이 조합이 해야할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천영옥 작가는 올해 7월 아트페어에 참가하고, 내년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작품 활동 말고도 세종시 도시재생사업, 조치원 발전위원회 활동을 통해 마을 연계 활동도 꾸준히 펼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