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과 조지 오웰이 논쟁을 벌인다면…

[유현주의 문학과 미술사이] 조지 오웰의 ‘1984’와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6-12-25     유현주

빅브라더(Big Brother)의 눈이 24시간 바라보는 사회. 소리는 줄일 수 있지만 꺼버릴 수 없는 기계인 텔레스크린이 눈 닿는 어느 벽이나 붙어 있는 그곳. 바로 감시와 통제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그곳은 사회주의당이 지배하는 영국을 가리킨다. 소설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의 3대 초강대국간 무한전쟁의 세계에 휩싸여있는 가운데, 오세아니아에 속한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1984'의 빅브라더 사회와 개인의 종말


사회주의당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매일 신문에 난 오류(사실)를 고치거나 없애는 일, 즉 역사위조에 복무하는 일을 담당한다. 물론 신문에 난 사실이 ‘오류’인지 아닌지는 ‘영사(영국 사회주의당)’의 정치기조나 정책에 부합하는지가 기준이 된다. 실제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당의 슬로건이 그 업무를 하는 이유이다.


무대는 영국 사회주의가 다스리는 사회지만 실제로는 오웰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 유지됐던 스탈린식 공산주의 혹은 한마디로 전형적인 ‘전체주의’ 사회다. 참으로 숨쉬기 힘든 감시 장치와 세뇌 식 교육,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언어의 제한이나 어휘의 삭감, 역사의 날조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감히 반역을 꿈꾸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심지어 사적인 공간에서 일기를 쓰는 것조차 텔레스크린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가장 놀랍고 소름끼치는 것 중의 하나는 사랑을 금지당하는 것이다. 진리부에서 같이 일하는 줄리아와의 연애는 사적인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중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순수하게 서로에게 이끌리는 감정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자식이 당의 진리와 일치하는지 부모를 감시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고해서 처형케 하는 사회, 전쟁영화나 폭력을 찬미하는 사회,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굴종, 무식은 힘”이라는 구호를 진리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개인의 사랑이나 자유로운 사상은 금기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오웰은 소설에서 이들의 연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들의 포옹은 전쟁이었고, 절정은 승리였다. 당에 맞서 한 대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 행동이었다.” 오웰은 왜 연애 자체가 정치이고 혁명일 수 있는지를 설파한다. 즉 “성욕의 박탈이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드는데 그 화를 전투 열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킨다는 것”, “사람이 행복하면 무엇 때문에 빅 브라더나 3개년 계획이나 2분 증오 같은, 그따위 더럽게 썩어빠진 일들에 흥분을 하겠”냐는 줄리아의 말은 오웰의 주장을 부연설명 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줄리아와 윈스턴은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며, 당 차원에서 보면 위험한 인물들이다. 때문에 평소 윈스턴이 호감을 갖고 있던 또 다른 당원 오브라이언이 이들에게 ‘형제단’에 가입을 권유하자 망설일 이유가 없던 이들의 결말은 결국 비극으로 이어진다. 상상을 초월한 고문은 마침내 이들이 서로를 배신하게 만들고 윈스턴의 입으로 빅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언어는 사상을 지배하고 인간은 사상에 지배된다. 소설의 말미에 부록으로 딸린 것은 ‘신어’에 대한 것이다. 빅브라더의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에게 부합하는 세계관과 표현 수단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단어들은 매우 제한적이거나 획일화된 의미만 갖는다. 예컨대 자유로운(free)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politically free)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 대신, 이 개는 ‘없다,’ 이 들판에는 잡초가 ‘없다’는 의미로만 사용된다. 쉬운 발음과 축소된 어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고 오로지 당의 이데올로기만 주입하기에 좋다는 이유로 확산시킨다.


보이지 않게 세밀하게 고안된 신조어들이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여기에 나온 이야기가 소설에나 있는 극단적인 예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 우리가 사는 세계의 많은 곳에서 언어의 고문들이 자행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좌파와 우파로 극단적인 대결로 치닫는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단어와 심지어 색깔이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던 역사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당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념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묻어버리고 자아 자체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로지 이데올로기화된 언어들과 사상들 그리고 조작된 기억들만 문서로 남긴 역사, 그것을 배우며 크는 아이들의 미래는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의 결과물일 테니. 결과적으로 사적인 것은 사라지고, 공적 영역이란 허구만 남는다. 그렇다면 공상과학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러한 사회의 미래는 텔레스크린에 의해 조종되고 빅브라더의 이념만이 기술적으로 전달되는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듯,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거대한 구경거리, 즉 자본주의의 화려한 스펙터클로, 가짜의 세계로 변해가는 것도 오웰의 소설과 일정부분 겹친다. 다시 말해,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확고한’ 세계가 무시무시하게 통제된 정치/종교/주술적 집단에 의해 주입된 가짜의 것일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오웰 씨” 미래는 어쩌면 멋진 세계일지 몰라요


조지 오웰이 불러일으키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반기를 든 작가가 있다.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작가 백남준이다. 1984년 1월 1일(미국시간)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생방송된 백남준의 텔레비전 쇼는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를 실시간으로 연결했다.


이 쇼는 미국 WNET 뉴욕 스튜디오에서 영상을 실시간 편집해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를 위성 연결했고, 한국, 일본, 독일 등에 생중계됐다. 이 작업에 머스 커닝햄, 이브 몽탕, 로리 앤더슨, 앨런 긴즈버그, 샬롯 무어먼, 톰슨 트윈스, 사포, 요셉 보이스, 어반 삭스 등 1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함으로써, 백남준을 전설로 만들었다. 전 세계 2500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진 이 쇼 때문에 그는 세계적 스타작가로 부상할 수 있었다. 백남준은 이 작품에서 빅브라더가 텔레스크린을 통해 권력을 집중하는데 사용했다면, 자신은 인공위성을 통해 수많은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비디오 쇼를 보여줌으로써 세계인들과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하고 싶어 했다.

 

 


실로 서구의 대중들이 텔레비전을 7시간이상 시청하던 60년대부터 백남준은 텔레비전의 빅브라더화 현상을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브라운관을 통해 전파되는 이념의 노예가 되지 못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그의 비디오아트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텔레비전의 영상을 자석의 자기장을 이용해 방해하면서 점차 영상 그대로가 아닌 추상화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자, 본격적으로 TV와 비디오를 캔버스로 삼아 미적 가능성을 탐구하던 그였다.


그러다가 백남준은, 드디어 인공위성으로 비디오를 내보내거나 실제 공연하는 작가들의 모습을 즉시 연결하고 편집해 내보내는 작업에 성공하게 된다. 마치 오늘날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이러한 전자 쇼들은 상업적인 쇼나 광고와는 색다른 시적 감성을 지니고 시청자 앞에 출현했다. 그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오웰에게 인사를 건네는 한편, 어쩌면 오웰이 뭔가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기술과 빅브라더의 정치에 휘말려 개인이 종말하게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혹은 인간은 바보가 아니라서 텔레스크린처럼 사방에 우리를 둘러싼 TV, 대형광고영상스크린, 컴퓨터, 핸드폰의 단순한 노예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그리하여 자신의 쇼에 출현한 예술가들처럼 자유롭고 창의적인 생각을 공유할 날이 올 거라고! 2014년 백남준 아트센터는 이러한 백남준의 작업세계를 기리기 위해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를 제작했다.


이 전시에서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영국으로 망명한 모나 하툼의 영상작업 <너무나 말하고 싶다>는 불연속적 이미지와 전화선을 통해 연속적인 소리를 전달하는 ‘슬로우 스캔’ 기술을 이용해 위성을 송출함으로써 이미지는 불완전하게 전달되지만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저항의 태도를 전달한다.


백남준은 아마도 미래를 어둡게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새로운 기술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심지어 일본의 공학자 아베 슈야와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를 만들어 비디오아트의 미학적 가능성을 시험하기도 했으며 무선으로 조종되는 예술적인 <로봇K 456>과 같은 형상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 로봇은 1982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교통사고 퍼포먼스로 사망했지만 말이다.


백남준에게 과학과 기술은 예술의 무한한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 것 같다. 그의 말년에 레이저 빛을 쏘아 만든 우주의 <삼원소>는 원, 삼각형, 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의 나무구조물을 양면 형태로 처리하고, 그 안에서 회전하는 프리즘을 통해 레이저 빛이 반사되어 뻗어나가며 기학학적 공간을 만든다. 그러자 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보이지 않던 공간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반(半)과학자인 예술가가 생각한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백남준이 레이저를 통해 빛의 존재를 보여준 것처럼, 우리는 기술을 이용해 베일에 싸인 저 우주의 공간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심지어 언젠가는 가볼 수도 있다. 빅브라더의 독재 또한 기술을 거꾸로 ‘저항적으로’ 사용한다면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SNS를 이용해 뉴스에 댓글을 달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무명의 논객들이 빅브라더 사회에 저항의 몸짓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백남준은 한마디로 미래의 위대한 사이버아방가르드의 총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백남준과 조지 오웰, 그 두 사람이 사차원의 세계에서 만나 인간과 기술,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과연 누가 논쟁에서 이길 것인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