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어머니, 투기 일삼는 여인으로 추락하다

[박한표의 그리스·로마신화 읽기] <4>‘질투의 화신’ 헤라

2016-11-11     박한표

#1. 제우스의 아이를 가진 레토는 헤라에 의해 모든 땅에서 내쫓기게 된다. 질투심 많은 헤라는 자기 자식보다 레토가 낳을 아이들이 더 위대해질 것임을 알고, 출산 장소를 내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해산을 허락하는 땅은 영원히 불모지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레토는 만삭의 몸으로 육지와 바다를 헤매고 다녔지만 헤라의 보복이 두려워 누구도 땅을 내주지 않았다. 출산 장소를 찾아 헤매던 레토는 마침내 바다를 떠다니는 작은 섬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자 헤라는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티아로 하여금 출산을 방해하도록 했다. 에일레이티아가 도착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출산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레토는 며칠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견뎌야 했다. 결국 9일 동안이나 산고를 겪은 끝에 가까스로 아이를 출산했는데, 그 아이들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다.


레토에게 출산 장소를 제공한 작은 섬은 그 후 4개의 기둥으로 단단히 바다 밑바닥에 고정되어 델로스(Delos) 섬이라 불리게 됐다. 델로스는 웅장한 신전을 갖춘 아폴론의 성지로 명성이 높다.


#2. 이오는 헤라를 섬기는 하녀 신이었다. 제우스는 이오에게 빠져들어 그녀를 유혹했다.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가리기 위해 구름으로 변신했으나, 아내의 감시를 피하기 어려웠다. 헤라에게 바람피운 것을 들킨 제우스는 얼른 이오를 하얀 암소로 변신시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제우스의 거짓을 간파한 헤라는 짐짓 모르는 척하고 그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했다. 헤라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의심을 받을 것이므로, 제우스는 암소로 변한 자신의 연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헤라는 아르고스라는 눈이 100개나 달린 괴물에게 암소를 감시하도록 했다. 이 괴물은 잠든 동안에도 몇 개의 눈을 뜨고 있어 감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암소가 된 이오는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우스는 이오를 구출하기 위해 심부름꾼 헤르메스를 보냈다. 그는 자신의 특기인 갈대피리를 연주해 아르고스를 잠들게 했다. 드디어 100개의 눈이 모두 감겼을 때 재빠르게 아르고스의 목을 베고 이오를 구출했다. 이때 죽은 아르고스의 눈 100개가 헤라의 공작 새 날개의 장식이 된다.

 

 

헤라의 박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헤라는 아직 암소로 변신된 채 있던 이오에게 쇠파리를 보냈다. 쇠파리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반은 미치다시피 한 이오는 여러 나라를 도망다니다, 마침내 바다 건너 이집트에 당도했다. 암소가 된 이오가 지나간 바다는 이오의 이름을 따 ‘이오니아 해’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오는 보스포루스(Bosporous) 해협을 건넜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가르는 좁은 해협 보스포루스는 ‘암소의 나루’라는 뜻이다.


이오는 이집트 땅에서 겨우 쇠파리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제우스를 만나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뒤 나일 강 근처에서 에파포스를 낳을 수 있었다. 그 후 이오는 이집트의 왕 텔레노고스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으며, 죽은 뒤에는 이집트 최고의 여신 이시스로 널리 추앙받았다. 그의 아들 에파포스는 이집트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3. 요정 칼리스토는 순결의 처녀 신 아르테미스를 추종해 남성을 멀리했다. 그래서 제우스는 자신의 딸 아르테미스의 모습으로 변신해 칼리스토와 사랑을 나누고, 아들 아르카스를 낳았다. 헤라는 질투심에 저주를 내려 칼리스토를 곰으로 만들어버린다. 졸지에 흉측한 몸을 입은 칼리스토는 숲을 헤매는 신세가 된다. 훗날 성장한 아르카스는 어머니의 일을 모른 채 사냥을 하러 다녔다.


어느 날 그는 숲 속에서 곰 한 마리와 마주쳤는데, 그 곰이 바로 자신의 어머니 칼리스토였다. 칼리스토는 한눈에 자신의 아들 아르카스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팔을 벌리고 아들에게 다가갔지만, 아르카스에게는 큰 곰일 뿐이었다. 아르카스는 곰을 찌르려고 날카로운 창을 겨누었다. 그 순간 제우스가 아르카스를 제지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비극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어머니와 아들 둘 다 하늘로 올려 보내 별자리로 만들었는데 어머니 칼리스토는 큰곰자리, 아들 아르카스는 작은곰자리가 됐다. 큰곰자리의 엉덩이에서 꼬리로 이어지는 부분이 북두칠성이다. 그리고 작은곰자리에는 북극성이 빛나고 있다.


헤라가 누구인가? 질투의 화신이 아니던가. 헤라는 연적이 별자리가 돼 천상에 있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헤라는 대양의 신 오케아노스에게 ‘이 두 별자리에게 휴식을 주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이 때문에 두 곰 별자리는 수평선 밑으로 지지 않고 끊임없이 밤하늘을 돌며 반짝이게 된 것이다.


위의 이야기들은 헤라가 연적들에 행한 복수를 담고 있다. 올림포스의 여왕이 ‘질투의 화신’으로 추락한 것이다.


헤라(Hera)는 그리스어 헤로스(Heros)의 여성 형이다. 바람둥이 남편 제우스의 곁에서 질투나 일삼는 속 좁은 아내이기 전에는 ‘여걸’이었다. 호머로스의 <일리아드>에는 헤라가 여왕 같은 위풍당당한 품격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여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헤라는 또한 가부장제가 시작되기 이전의 원시 모계사회를 대표하는 여신이었다. 생명의 원천인 땅은 항상 생명의 모체인 여성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생명 탄생의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 여성은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었다.


헤라는 결혼과 가정의 수호신답게 정숙한 아내의 모습을 잊지 않았다. 정식 부인을 얻은 뒤에도 제우스의 화려한 바람기가 수그러들지 않아 ‘질투의 화신’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편의 외도를 견제하는 헤라의 투기는 엄격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들에게 철저히 종속된 여인네들의 소극적인 저항의 몸짓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헤라가 바람난 제우스를 직접 공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대신 부부관계를 위협하는 남편의 연인과 그 자식들을 공격함으로써 가정을 수호하려 한다. 헤라가 결혼과 가정의 수호신으로 평가받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제우스의 바람기와 더불어 헤라는 만물의 위대한 어머니에서 남성에게 철저히 종속된 여성상의 표본으로 변질되어 버린 셈이다.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피워 낳은 자식들에게도 복수를 했다. 디오니소스와 헤라클레스가 대표적이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디오니소스와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둘 다 신의 지위를 얻는다.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자매인 헤스티아를 밀어내고 올림포스 12신 자리를 차지했으며, 헤라클레스 역시 신의 지위를 획득할 뿐만 아니라, 헤라의 딸인 헤베(청춘의 신)와 결혼함으로써 헤라의 사위가 된다.


헤라클레스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선택 한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죽은 육신은 어머니의 품인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아버지 곁인 하늘로 올라갔다. 헤라의 모든 박해를 견뎌내고 승리한 헤라클레스는 모권신화를 종식시키고 부권신화를 확고히 정립시킨 순교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