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논란 박범신과 논산시의 짝사랑

[이길구칼럼] 그가 고향 떠나기를 바라는 이유

2016-10-24     이길구

충남 논산출신 인기소설가 박범신(71) 씨의 성추행 소식이 뜨겁다. 논산시민의 한사람으로 그의 이상한 행동(?)에 안타까운 면도 있지만 이번 기회에 그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역민들의 바람이다. 그가 개인 박범신을 넘어 ‘논산의 자랑 박범신’이 된지 꽤 오래 됐기 때문이다. 그가 논산시민의 혈세를 이용해 자신의 문학관을 비롯한 여러 가지 행사를 하고 있기에 이번 기회에 바로 잡아야한다는 여론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자란 논산과 강경을 배경으로 많은 소설을 썼다. ‘논산일기’를 비롯한 많은 글에서 그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논산을 위해 그가 존재하기 보다는, 그를 위해 논산이 존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논산시와 시민들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받고 있다.

 

시민·도민 세금 지원 타당한가

 

자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그가 서울에서 고향인 논산으로 온 배경이 모호하다. - 실제로 내려온 것은 아니다. -  고향이 좋아서 집을 사고 짐을 싸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모 논산시장이 권유해서 내려왔다는 전언(傳言)이다. 그것도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그는 내려오자마자 탑정호 주변에 ‘박범신 집필관’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물론 논산시의 막대한 예산지원이 뒤따랐다. 이후 그는 논산의 대표적 작가로서 영세(零細)한 논산시에 비해 너무 많은 예산과 혜택을 누려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를 위해 논산시와 충남도에서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내용만 살펴보자. 앞서 말한 것처럼 엄청난 예산을 들여 ‘박범신 집필관’ ‘박범신 디지털 문학관’을 개원한데 이어, 매년 그가 주도하는 행사는 ‘와초 박범신 문학제’ ‘탑정호 박범신 바람길’, ‘박범신 문학 콘텐츠 연구사업’ 등이 있다. 이외에도 논산문화원에서 그를 위한 출판기념회를 주선했는가하면 특강 등 그를 위한 행사가 부지기수다. 그는 자신의 성추행 관련 언론보도에도 불구하고 지난 21-23일 사흘 동안 열린 바람길 행사에서 자신의 팬들과 함께 탑정호와 강경의 금강변을 유유히(?) 누볐다.


필자는 박범신 작가와는 일면식(一面識)도 없다. 필자도 고향이 논산이고 지금도 살고 있어서 논산시 각종 문화행사에 참여했지만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우연히 탑정호에 갔다가 ‘박범신집필관’이 있기에 구경하려 했으나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논산시청에 수소문 내어 알아보니 “작가가 집필관에 있을 때만 일부 공개한다”고 한다. 필자는 의아심에 “언제 작가가 계시느냐고 물으니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


고향보다 더 큰 부여 사랑 유홍준, 그리고 박범신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논산시에서 그를 위해 집필관을 지원해 준 것이나 매년 일정액의 인력과 예산을 배치해 준 것은 모두 논산시민을 위해서다. 특히 필자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그를 만나 문학에 대해 자문이나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전문가의 입장에서 조언을 듣고 싶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다. 그는 지역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서울의 큰 인물(?)이다. 그래서 자신의 행사 때나 자신이 필요할 때만 집필관을 찾아온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 부여의 백제문화제에 참석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자신이 소중히 간직한 문화재급 유물을 다른 곳도 아닌 부여문화원에 영원히 기증하셨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그곳이 고향도 아니고 부여군의 아무런 도움도 없이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간간이 그는 부여군민을 위해 지역 내 문화재를 소개하는가하면 무료특강을 하면서 재능기부도 열심히 했다. 그에 반해 우리고장을 대표하는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은 고향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공자님이 하신 말이 언뜻 생각나서 적어본다.


“나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子曰 朝聞道 夕死可矣.【論語 里仁8章】)는 마음으로 공부하였다. 그리고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뜻이 뚜렷하게 섰으며, 마흔 살에는 판단에 혼란이 없게 되었고, 쉰 살에는 하늘이 내린 사명을 깨닫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듣는 대로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일흔 살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吾 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論語 爲政4章】)”

 

나이 칠십이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는 나이’다. 그리고 조용히 그동안 했던 일을 정리하고 후학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박범신 작가의 나이도 이젠 70이 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대학교수에, 방송국 이사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에, 각종 소설상을 휩쓴 그야말로 누릴 것은 다 누린 인물이다. 더구나 영화로 제작된 소설만 11편이나 되는 현존하는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이며 특강 섭외 1순위 작가다. 그런 그가 뭐가 부족해 고향에 와서 관(官)에 의지해 집필관을 짓고 예산을 받아가며 행사를 하는가. 이런 일들이 고향을 위한 봉사라고 할 수 있는가.


누릴대로 누린 인생, 고향 덕보며 살 필요 있나

 

필자는 이번 기회에 그가 조용히 논산을 떠났으면 한다. 성추행에 연루되어 논산의 이미지를 먹칠한 것도 있지만 그가 과연 고향 논산을 위해 어떤 일을 사심 없이 했는지 수긍하기 어렵다. 논산을 이용해 각종 혜택만 받고 자신의 홍보와 치적에만 이용한 것 아니냐는 여론이 많다. 논산시민이 낸 세금으로 그의 개인 집필관을 운영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논산시나 충남도도 조속한 시일 내에 대책을 강구하여 앞으로는 단 한 푼이라도 그를 위해 예산을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젠 논산시민들이 그를 떠받치고 지원해줄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동안 논산시의 박범신 작가에 대한 애정은 눈물이 줄줄 흐를 정도다. 문화재 가치도 없는 그의 생가 터를 문화재처럼 보존 관리하는 것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논산시에서 ‘뒷받침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범신 디지털 문학관’ 홈페이지 메인화면에는 젊은 은교와 사랑하고픈 내면을 잘 드러낸 박범신 작가의 말이 등장한다.


"영원한 청년 작가.
모든 것이 멀구나. 나는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맸다.
사랑만이 내가 굴종하고 싶은 최상의 권력이다!"


그는 주변의 여성들을 젊은 은교, 어린 은교, 늙은 은교로 구분하면서 마치 자기 소설을 한 장면인양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트윗에 이렇게 변명하고 있다.


"내 일로 인해~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어요. 인생-사람에 대한 지난 과오가 얼마나 많았을까, 아픈 회한이 날 사로잡고 있는 나날이에요. 더 이상의 논란으로 또 다른 분이 상처받는 일 없길 바래요. 내 가족~날 사랑해준 독자들께도 사과드려요."


영원한 청년 작가 박범신.
그는 아직까지 사랑을 주제로 소설을 쓰고 소설 속에서 살고 헤매며 허구와 현실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자신의 지상 최상 권력인 사랑을 위해 오늘도 전력투구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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