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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사직 앞에 목숨 바칠 준비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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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사직 앞에 목숨 바칠 준비 되었는가?
  • 글 유태희·그림 조석희
  • 승인 2018.12.15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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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소설 이하응 : 리멤버 1863] <5>동리정사 결의

저녁 무렵 흥선은 오랜만에 신재효가 운영하는 조선 최초의 창학교(唱學校) 동리정사(棟里精舍)를 찾았다. 두 사람이 사랑방에서 마주 보고 앉아있다.

“흥선군 대감 나리, 오셨습니까.”
“아이고 잘 계셨는가. 그동안 적조했네.”
“아이고 뭘요,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이는 신재효를 바라보며 흥선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잇는다.

“미안하네만 자네하고 상의치 않고 몇 사람을 더 불렀네.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일세. 눈이 무서워 아무 데서나 만날 수 있어야지.”

흥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재효가 탄식을 늘어놓으며 혀를 찬다.

“어허, 죽일 놈들 같으니. 쯧쯧쯧.”
“당분간 자네에게 신세를 좀 져야겠네.”
“어이쿠, 대감 어른. 어찌 당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고맙네. 내 나중에 반드시 보답할 날이 있을 걸세.”

흥선이 뒤따라 오는 신재효를 바라보며 다시금 다짐을 받는다.

“그럼, 사람들 입단속이나 잘 시켜주게나.”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때 껄렁껄렁 왁자지껄 한 무리가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다. 장안에서 왈패로 이름 꽤 날리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천하장안이라고 부른다. 이들 중 맏형 노릇을 하는 이가 천희연이다. 이들이 피차일반인 것은 궁궐 안에 형제나 누이를 하나씩 들여보낸 덕에 먹고산다는 것이다. 모두 사랑채로 들어와 흥선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윗목에 자리 잡고 앉는다.

삽화=태도(太道) 조석희

흥선이 아랫목에 앉아 기침을 몇 번 하는 동안 천하장안은 자못 궁금했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시피 만나서는 술에 취해 흥청거리고 싸움질에 질펀하게 농지거리하며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그런 흥선이 정색하고는 모두를 불러 모았으니 이유를 알고 싶어 안달 난 표정들이다. 맏형 노릇을 하는 천희연이 흥선의 눈치를 살피며 먼저 말을 꺼낸다.

“큰형님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흥선이 대꾸하지 않는다. 칼 잘 쓰기로 이름난 진주 출신 안필주가 농을 섞어 묻는다.

“행님요, 한몫 잡으셔서 크게 한턱 팍 쏴삘라꼬 부르셨습니꺼?”

그래도 묵묵부답이다. 뜸을 들인다는 것은 흥선이 대화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얘기다. 이번엔 왕십리 출신 하정일이 나섰다.

“헤헤, 척 보면 몰라, 한 수 가르치실 모양이시네.”

천희연이 눈치를 살피다가 양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에 힘을 줘 윽박지른다.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게야.”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장순규가 거든다.

“아이고, 형님들 가만히 좀 계시오. 눈치가 그렇게 없으세요들.”

흥선이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는 천하장안을 보며 빙긋이 웃더니 입을 연다.

“그래, 동생들 모두 왔는가. 지금부터 내 이야기 잘 듣게나. 알았는가?”

모두 귀를 쫑긋 세운다.

천하장안은 이런 무거운 분위기가 낯설기만 하다. 평생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해온 사람들이다. 흥선은 지금이야말로 이 패거리를 거사에 연루시킬 호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비록 시장바닥에서 술친구로 만나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아닐세. 내가 종친이라는 것을 동생들이 모르지는 않을 터이고. 곧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아 조선의 앞날을 새로이 열고자 하네.”

흥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 안 분위기가 싸해졌다. 모두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기색이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재효도 마찬가지다. 흥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우리도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술에 취해 세월을 허비할 텐가. 자네들과 함께 도탄에 빠진 조선을 구하고 싶네. 이제 정말 장부(丈夫)의 도리를 다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말일세. 아니 그런가?”

흥선의 일장 연설에 모두 낯빛이 불그스레 달아올랐다.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뜨겁게 솟구쳤음이 분명하다. 흥선이 이를 놓칠 리 없다. 흥선이 나지막하지만, 결기에 찬 목소리로 호소한다.

“모두 함께하세. 자네들이 도와주셔야 하네.”

그제 서야 모두의 낯빛이 환해졌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말일세…”

흥선이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잇는다.

“모두 알다시피 기찰이 심하니 행동거지는 물론이요, 말 한마디도 살펴야 하네. 큰일을 앞에 두고는 끼고 자는 계집, 부모 형제까지도 입단속을 잘해야 함일세. 네 단단히 이르니 명심, 또 명심들 하시게나. 약조할 수 있겠는가?”

옆에서 묵묵히 흥선의 말을 듣고 있던 신재효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천하의 건달인 줄 알았던 천하장안이 늠름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흥선은 역시 철두철미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

흥선이 일어서서 한 사람씩 눈을 마주치며 두 손을 잡아 흔든다. 그때 밖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린다. 신재효가 나가더니 몇 사람과 같이 들어왔다. 한 사람은 역관 오경석이고 다른 사람은 관상가 박상의다. 무장 이경하와 신헌이 이들을 뒤따라 들어왔다.

흥선이 기다렸다는 듯 반긴다.

“아이고 장군, 난 또 누구시라고. 어서 오세요. 기다렸습니다.”

흥선이 차례로 이경하와 신헌의 두 손을 굳게 잡는다.

“어서들 오세요. 모두 기다렸습니다. 역매는 아침 식전에 내가 이미 만났소이다.”

오경석 뒤에 서 있던 박상의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흥선이 다시 사랑채로 들어가 좌정하자 모두 앉아서 예를 갖춘다. 흥선이 모두를 둘러보고는 입을 연다.

“고맙소이다. 힘없고 못난 종친을 이렇게 찾아주니 감지덕지올시다.”

흥선의 소개로 서로 통성명을 한 뒤 제일 나이가 많은 이경하가 말을 꺼낸다.

“종친께서 오늘 자리를 마련해 조선을 바로잡고자 하신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 모두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시했다. 흥선이 입을 연다.

“이경하 장군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 이 자리는 내가 품은 대의에 동참해달라는 의미로 마련한 것이오. 모두 내가 믿을만한 분들이니 천군만마가 따로 없소이다.”

이경하가 대표로 대꾸한다.

“말씀만 하십시오.”

모두가 말없이 흥선을 바라본다.

“몇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쓰러져가는 조선을 살리려는 마음은 여러분과 같을 것이오. 지금이라도 혹여 마음이 변했다면 이 자리를 떠도 좋소이다.”

모두가 긴장하며 흥선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어떻소? 모두 마음의 준비가 됐소?”
“예.”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흥선이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흥선이 재차 다짐을 받는다.

“좋소이다. 다시 한번 묻겠소. 모두 조선의 오백 년 사직 앞에 목숨 바칠 준비가 되었는가?”
“예.”
일동이 결의를 보였다.

흥선이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좋소. 그동안 허수아비 임금을 세워 왕실을 농락한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조선을 새롭게 바꿉시다. 내 여기 있는 동지들과 조정을 바로 세우고 조선을 외세로부터 지켜낼 것이오. 밖으로는 역매 오경석의 도움을 받고 안으로는 나와 동지들이 신명을 다한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소.”

이경하 장군의 옆에 앉았던 신헌 장군이 나선다.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흥선이 신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몇 천 년 동안 지켜온 값진 이상과 가치를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이오. 그래야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를 증명할 수 있지 않겠소.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잃어버리게 하였으니 이제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런 세상을 다시 찾아줘야 하지 않겠소. 내가 앞장서겠소. 따르겠소?”

일동 모두가 엎드리며 다짐한다.

“따르겠습니다.”
“따를 것입니다.”

흥선이 입을 앙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며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친다. 그렇게 무리가 결의를 끝내고 돌아간 후에도 동리정사에 몇 사람이 남아 있었다. 흥선과 신재효, 박상의다.

신재효가 흥선에게 묻는다.

“대감 어른, 술상 낼까요?”

흥선이 신재효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 걸작이다.

“그 소릴 들으니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하구려. 조금 전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오. 허허.”

박상의가 한마디 한다.

“대감 나리께서 워낙 주유천하 하시다가 이젠 중독되신 게 아니신지요?”

신재효가 박상의에게 눈을 흘기며 말한다.

“그럴 리가 있는가 이 사람아. 여봐라, 여기 준비한 술상 가져오너라.”

잠시 후 젊은 여인이 술상을 들여온다. 신출내기 진채선이다.

얌전한 옷매무새의 진채선이 납신납신 대며 아랫목 흥선의 옆자리에 앉는다. 동동촉촉(洞洞燭燭) 하는 짓이 여염집 규수는 뺨 맞고 갈 판이다.

신재효가 명한다.

“종친부 유사당상이시다. 대감께 인사 여쭙거라.”

진채선이 부끄럽다는 듯 새치미를 뗀다. 그러더니 이내 안색을 바꾸며 말한다.

“대감 어른께 인사 올립니다.”

채선이 큰절을 올리자 흥선이 낭창낭창 묻는다.

“그래, 올해 나이가 몇인고?”

“열아홉이옵니다.”

“나를 아느냐?”

“예… 송구하옵게도 영상대감 생일잔치에서 뵈었습니다.”

“어허 그래, 이거 망신당한 것을 들켰구나.”

신재효와 박상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허허, 내 이래 봬도 조선 제일의 귀명창인 걸 아느냐. 그날 내 들어보니 심 봉사 눈뜨듯 귀가 번쩍 뜨이지 않았겠느냐.”

박상의가 거든다.

“아무렴요. 한양에서 제일가는 명창이시지요.”

대원군이 너스레를 떤다.

“맞다마다. 어린 나이에 소리에 재주가 있더구나. 사설과 너름새도 좋으니 더 닦고 급급하여 득음하거라.”

“예, 대감마님.”

“그래 됐다. 이제 네 술 한 잔 얻어먹자꾸나.”

진채선이 자세를 고쳐 잡고 술을 따른다.

흥선이 신재효를 빙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여보게, 내 청나라 사신으로 간 판서들에게 부탁해 유리창에서 사 온 책들을 보지 않았겠나. 보아하니 서양에도 노래로 하는 마당극 같은 것이 있던데… 자네들은 들어보았는가?”

신재효의 눈이 동그래진다.

“대감 어른, 금시초문입니다.”

“그렇겠지. 내 요사이 북경에서 온 서책을 구해 읽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네만… 그 서양 마당극을 오페라라고 하더군. 그런데 우리 소리는 너무 길지 않은가 말이야. 좀 짧아야지, 어떤 대목은 지루하기 짝이 없어. 노래 듣다가 해지고 해 뜨고 날 새고 해가 뜨지 않느냐 말일세.”

“예, 그렇지 않아도 지금 옛것을 새로 고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맙네. 왕실에서 할 일을 사재를 써 하니, 다 알아줄 날이 있을 걸세. 그래 요사이 명창은 몇이나 데리고 있는가?”

“아직 몇 명 되지 않습니다. 그저 이날치, 박만순, 전해종, 정창업, 김창록, 허금파와 지금 이 아이 채선이가 다입니다.”

“애쓰시네… 그리고 자네…”

흥선은 모처럼 술상을 받았지만 몇 잔을 마시지 않았다. 천장만 쳐다보던 흥선이 흘끔 진채선을 지그시 바라본다.

잠시 후 흥선이 박상의를 쳐다보며 묻는다.

“고산자는 만나보았는가?”

“예. 며칠 전에 겨우 만나보고 상의를 했습니다. 곧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만…”

“으흠, 지도를 완성하려고 팔도를 누볐으니 용자리 하나쯤은 알지 않겠는가? 그래 뭐라고 하든가?”

“전에 정만인이 대감께 말했던 2대 군왕지지라는 예산의 상가리 있잖습니까. 고산자와 곧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흥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나도 형제들과 상의하여 가 보기는 해야 할 텐데… 전하께서 옥체보존이 가끔 어려우시니 어디 마음대로 자리를 뜰 수가 있어야지.”

흥선에게는 앉으나 서나 궁궐 일이 우선이었다. 철종 임금이 위중하기라도 하면 당장 급한 일이 태산이어서다. 오백 년 조선의 운명이 지존에게 달려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더구나 그 어느 때보다 종묘사직이 풍전등화 아니던가.

이번엔 박상의가 입을 연다.

“고산자는 산을 보려면 적어도 조선의 산맥과 하천을 관통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북한산은 백두대간에서 용틀임한 대맥이고, 관악산은 서울의 턱 앞이지만 속리산에서 달려온 내룡맥이라 했습니다. 마치 사람의 등뼈같이 솟은 산등성이의 맥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몇 번을 굽이치면 반드시 큰 자리가 생긴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그 법도를 제대로 보아야 용자리를 볼 수 있다 하였습니다.”

흥선이 박상의가 하는 말에 토를 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것이 제대로 보는 풍수겠지. 수고했네, 애써주시게. 이제 이 아이 소리나 한번 들어봄세.”

흥선이 다시 진채선을 흠씬 쳐다본다. 신재효가 진채선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북을 잡아든다.

진채선이 냉큼 일어나 배례하고는 자리를 잡는다.

“춘향전 한 대목 올리겠습니다.”

이어 신재효가 북을 치며 추임새를 넣자 진채선이 소리를 시작한다.

삽화=태도(太道) 조석희

“방자가 진허리 참나무 뚝꺽거 것구로집고 출님풍종 맹호갓치 밧비뛰며 건너가서 눈우의다 손을언고 벽역갓치 소래을질너~.이애 춘향아 말듯거라 야단낫다 야단낫다.

춘향이가 깜짝눌나 추천줄의 둑여날여와 눈흘기며 욕을 하되,

애고 망칙해라 제미씹 개좃으로 열두다섯번 나온년석 누깔은 어름의 잣바진 경풍한 쇠누깔갓치, 최생원의 호패구역갓치, 또 뚜러진년석이 대갈이는 어러동산의 문달래 따먹든 덩덕새대갈리갓튼년석이, 소리는 생고자 색기 갓치 몹시질너 하맛트면 애보가 떠러질번 하엿지. 방자놈 한참듯다가 어니업서,

이애 이 지집아년나, 입살리 부드러워 욕은 잘 한다만는 내 말을 들어 보와라.”

흥선이 진채선을 쳐다보는 눈이 지긋하다. 밤은 깊어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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