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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은 한겨레” 평생 되뇌던 소설가 김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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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은 한겨레” 평생 되뇌던 소설가 김제영
  • 유태희
  • 승인 2018.12.0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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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문화예술계 큰 별 지다… 사상적 편 가르기 경멸, 소설에서 예술평론 선회
7일 오전 세종시 은하수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이 하늘로 떠난 김제영 선생을 배웅하고 있다.

세종시 문화예술계의 큰 별이 졌다.

1928년 제주 출생인 고(故) 김제영 선생은 25살이 되던 해에 조치원읍에 정착한 이후 지역 문화예술계의 큰 어른 역할을 해왔다. 그런 그가 지난 4일 오후 9시 30분 향년 9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김제영 선생은 1946년 이화여고를 졸업한 뒤 대한민국 농림부 장관이었던 죽산 조봉암의 비서로 일했다. 196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석려’가 당선되면서 등단했으며, 민국일보 문화부 기자, ‘무용한국’ 편집고문, ‘월간음악 객원’ 편집인, ‘미술21’ 편집고문, ‘미술세계’ 객원편집인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쳐왔다.

필자는 몇 년 전 고향인 세종시로 돌아와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당시 청초한 모습의 김제영 선생이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기억이 새록하다. 연주회에 오셔서 용기를 주시기도 했다.

김 선생은 슬하에 1남 4녀를 뒀는데, 상주(喪主)인 차지민 교수는 단국대 미생물학과 교수다. “나라가 힘드니 이과를 선택해 보탬이 되라”는 어머니의 당부로 자연과학 연구자가 됐다.

차 교수는 모친에 대해 “자애로우시고 엄하신 분이었고, 몸소 실천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손주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각자의 생각을 글로 써보라고 권하셨다”고도 했다.

차 교수의 큰 누이는 미국 뉴저지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콩쿠르에서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 한다. 서울대 기악과를 졸업했고, 현재 뉴저지에서 살고 있다.

둘째 누이도 음악을 하다 전공을 바꿔 미국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다. 여동생은 둘 있는데, 하나는 도예를 전공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 미국에서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김제영 선생의 손녀와 상주인 차지민 교수가 각각 영정과 유골함을 들고 선생의 마지막 길을 동행하고 있다.

차지민 교수는 소설가로서의 모친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가 미술, 음악, 무용 등의 평론을 집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를 “남과 북이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문화예술마저 사상적 이념으로 편 가르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김제영 선생은 아들에게 “우리는 한겨레다”라는 말씀을 자주 했다고 한다. 차 교수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한겨레를 모두 껴안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큰 품성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형제 폐지를 줄곧 주장하셨다”고도 했다.

김제영 선생은 평생 글을 썼다. 인생살이의 교훈을 주는 문학 작품을 많이 남겼고, 평론을 통해 예술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했다. 선생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담은 예술 활동이 더 활발히 펼쳐지기를 바라고 바랐다. 남겨진 우리의 어깨가 무겁다. 삼가 선생님의 영전에 고개를 숙인다.

한편, 김제영 선생은 소설작품집 ‘거지발싸개 같은 것’(1981),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1990)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단편소설 ‘역전소묘’는 1960년대 조치원역을 배경으로 서민의 고달픈 삶을 어루만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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