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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홍일점이 판소리 무형문화재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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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 홍일점이 판소리 무형문화재 된 사연
  • 유태희 문화전문기자
  • 승인 2018.07.1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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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문화 인물] 세종시 무형문화재 임영이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로 세종시 무형문화재인 임영이 선생. 최근 세종문화원 원장 12년 임기를 마무리했다.

‘세종특별자치시 무형문화재 3호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임영이.’ ‘임영이 소리연구소.’ 시원하면서 힘이 느껴지는 필체의 널조각 두 개가 현관 옆에 걸려 있다.

임영이(71) 선생의 자택은 고복저수지가 고즈넉하게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문을 두드리자 환한 웃음으로 반가이 객(客)을 맞이한다.

몇 번을 연락해서 겨우 허락을 얻은 인터뷰인지라 미안함부터 앞섰다. ‘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마다할까’ 생각에 잠긴 채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뿐사뿐한 걸음새가 일상적이어서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쪼르륵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세브르 혹은 웨지우드로 보이는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를 따르고 있었다.

한 모금 홍차를 음미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 얼마 전 세종문화원장 임기를 마쳤는데, 소회가 어떤가?

“문화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것만은 꼭 지켜야겠다는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가 지역 문화예술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계기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시다시피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만들지만 일단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갖고 스스로 법칙을 만들지 않는가. 문화원의 역할은 그런 것들이 자랄 수 있도록 멍석을 까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공평한 행정을 유지함으로써 불편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12년 임기를 마칠 동안 스스로 약속했던 원칙을 잘 지켰다고 자부한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문화예술이 융성한 ‘명품 세종시’를 위해 나의 작은 경험이 필요하다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도울 생각이다.”

고복저수지가 고즈넉하게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임영이소리연구소 전경.

― 국악인으로서, 평생 걸어온 예술인의 길을 되돌아본다면?

“예술인의 길이라고 거창하게 말씀해주셨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거창한 것들을 생각하고 살지 않았다. 다만 제 친정 아버님이 애국자셨고 원칙주의자셨다. 우리 것을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시라 제 인생도 그런 바탕에서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분단국가라는 현실에 분개하셨던 분이다. 학교에서 우리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며 집에서 가야금산조부터 우리 것을 접할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아버지는 경성치전 3회 졸업생이시고 나라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그런 분이셨다. 계룡고등학교 이사장을 지내셨고, 유교사상이 꽉 박혀있었던 분이다. 여자는 많이 배우면 안 된다며 큰 언니부터 나까지 학교를 못 다니게 하셨다. 우리가 딸 일곱에 아들 셋 십 남매다. 큰언니가 대전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안 보내려고 하자 울면서 죽을 각오로 매달리자 허락해 주셨다. 둘째 언니도 대전여고 우등생이어서 이화여대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었는데도 보내지 않으려 했다. 둘째 언니는 서울에 있는 외삼촌 댁에 살림 배우러 간다고 핑계를 대고 이화여대에 갔지만, 등록금 때문에 들켜서 1년 만에 잡혀 내려왔다. 셋째 언니도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이 아버지를 찾아와 서울대에 보내야겠다고 하니까 학교문제라면 그냥 가시라고 하더라.

이제 내 차례가 되었는데 역시 안 된다는 거다. 내가 고집이 세다 보니 학교에 갔다 오면 집에서나 아버지 병원에 찾아가 대학 보내달라고 울어댔다. 그랬더니 어느 날 아버지가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논문형식으로 써내라고 하더라. 글을 읽으시고는 ‘네가 어떻게 가정교육을 받았기에 대학을 간다고 그러느냐, 네가 퀴리 부인이라도 되려고 그러는 게냐’ 하셨다. 그러시면서 서울 쪽 대학은 안 되니 지방대에 가라고 허락했다. 내가 충남대 공대 홍일점 여학생이 된 배경이다.”

― 아버지께서 유독 여성이 교육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까닭이 있었나.

“아버님은 사람의 본분, 여자의 본분에 대해 누누이 강조했다. 신여성들이 지식을 앞세우고 이론을 앞세워 여성의 본분을 마다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훈육을 등한시하면 배운 지식도 쓸모없다는 거다. 아주 유교적인 사상이 골수에 박히신 분이었다.

― 우리 소리는 어떻게 시작했나.

“충남대 1년을 마치고 결혼을 했는데 분단국가에서 무슨 혼수 나며 가야금만 해주셨다. 사치와 낭비라는 거다. 시아버지께서 내가 가야금을 배운 것을 중매쟁이를 통해 아시고는 혼인날 한 번 연주해보라고 하셨다. 그동안 가야금은 제쳐두고 공부만 했던 터라 청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당시 서울 삼성동 무형문화재전수회관을 찾아갔다. 운명처럼 다른 교실에서 교습하시는 조상현 선생님의 소리를 듣고 우리 소리를 배워야겠다 싶었다. 그때가 84년인가 다음 해인가 정확히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소리를 하고 있다.”

임영이 선생의 부친은 경성치전 3회 졸업생으로 계룡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여자는 교육을 많이 받아선 안 된다는 일념으로 딸들을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임 원장은 충남대 공대 홍일점으로 입학했다.

― 가야금 다시 배우려다가 소리가 평생의 삶이 된 셈이다.

“그렇게 됐다. 나를 가르쳐주신 여선생님이 계셨는데, 한귀례 선생님이시다. 그분도 나중에 문화재가 되셨지만, 사연이 소설 두 권은 되시는 분이다. 선생님이 이민이라는 영화배우와 결혼하셨다가 헤어졌다. 평생을 혼자 사셨는데 생활이 안 되니까 요정에 나가셨다. 유력 일간지 사장이 술에 취해 입맞춤하려고 하자 혀를 깨물었다는 사건이 있을 정도로 결벽증이 있는 분이셨다.

나에게도 무대에 서지 못하게 하셨다. 부인들이 점잖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한 선생님은 계속해서 문화재가 되지 못하셨다. 당시에 ‘준문화재 제도’란 게 있었는데 문화재가 작고하시면 그분이 문화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워낙 소심하셔서 치열한 경쟁을 이기지 못하셨다. 그래도 말 한마디 못하시는 분이었다. 나중에는 문화재 소리만 나와도 외면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러다가 2002년에 (문화재청이) 찾다 찾다 못 찾으니까 선생님에게 문화재를 줬다. 나도 덩달아 애를 먹었다. 문화재 선정 시기만 되면 나더러 신청하라는 거다. 선생님께서 문화재가 되지 못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신청할 수가 있겠나.

물론 문화재청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다. 그래선지 문화재로 선정되시고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너무 좋아서 쇼크사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무 마음고생이 심하시다가 막상 받고 보니 쇼크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나도 사실 몇 년 배우려고 했지 평생을 하려던 생각은 없었다. 아들 훈육할 때마다 사람이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올무가 되어 여기까지 온 게다.”

― 전국의 문화원들이 문화재단 설립을 반대했었다. 이유가 있었나.

“문화원장으로 취임했더니 전국에 224개의 문화원이 있다고 하더라. 나중에 평가를 받는데 등수 안에는 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이 먹었으면 그냥 의전행사에 나가 박수나 받고 그러면 되지 직원들을 왜 이렇게 못살게 하느냐’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래도 굽히지 않고 소신대로 일했더니 이제는 ‘놔둬 한 일 년이나 하고 말겠지’ 그러는 거다.

이 세상에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있나. 50여년 전에는 문화원이 연명 자체가 급급할 때였고, 문화라는 말 자체가 유명무실했다. 문화행사라는 것도 죄다 주도였다. 문화재단이 탄생할 무렵에는 내가 문화원연합회 이사로 있을 때다. ‘이건 예산 낭비다, 문화원을 확대하면 될 일인데 재단은 왜 만드느냐’ 그랬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국회 통과를 시켰다. 우리 쪽에서는 전국 문화원 서명운동을 해서라도 막자는 신진세력들도 있었다. 정관 내용을 보면 98%가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장님들 대부분이 ‘귀찮다’는 식이었다. ‘나이 먹고 할 게 이것뿐인데 대접이나 받지 뭐’ 이런 자조적인 분들이 많았다.

― 선생께서는 문화재단 설립에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그랬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문화재단 설립은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였다. 단 문화원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문화원이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로 꿈의 오케스트라라는 제도가 있었다. 전국 문화원이 경쟁하여 세종문화원이 1억 6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연주회를 두 번 개최했다. 이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줬다고 자부한다."

― 문화원과 문화재단의 역할조정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인가.

"문화원과 문화재단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 문화재단은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시 곳곳에 산재한 지방문화를 세세히 알지 못한다. 문화원이 이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 임영이' '임영이소리연구소' 현판이 걸린 임영이 선생 자택.

― 마지막으로 세종시민과 예술인의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세종시민 여러분께 할 말이 없다. 좀 더 나은 문화를 선보이고 격조 있는 예술을 접하게 해야 하는데도 내가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것은 아닌지 송구스럽다. 신임 원장님이 유능하신 분이니까 그분이 잘해서 빚을 갚아주실 것으로 믿는다.

후배예술인들에게는 그저 미안할 뿐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예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다. 열악하다. 불모지다. 사실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시작하고 계속하라고 말하고 싶다. 욕먹을 이야기지만 환경이 열악해도 내가 개척한다는 선구자적인 철학으로 이 길을 가서 목표를 이루라고 말하고 싶다.

나도 남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출연료 한 푼 받지도 못하고 무대에 오르고 가끔 외국에 나가 출연료 받고, 대학에 나가 강사료 받으면 모두 장학금으로 내놓은 것도 남편 덕분이다. 후배 여러분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무소의 뿔을 세우고 앞으로 나가시라고 말하고 싶다.”

임영이 선생이 유별나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판소리 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서가 아니고, 판소리 흥보가 보유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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