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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슬픈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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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의 슬픈 초상화
  • 최태호
  • 승인 2017.09.0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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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

1998년에 그를 처음 만났다. 가녀린 어깨에 보호본능을 일깨우는 지식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밝은 표정에 첫 만남을 어색하지 않게 하는 중년의 학자였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말수는 적었고, 점심 먹으면서 막걸리 마시는 폼이 여느 문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필자는 그와 동일한 제목의 저서를 냈고, 동일한 제목의 강의를 했다. 물론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와 마 교수가 근무하는 학교는 지리적으로 멀었지만 문학에 관한 이론은 통하는 것이 많아 대화는 항상 즐거웠다.

한 번은 필자의 교양 강의(문학과 성)에 그를 초대했었다. 걸쭉한 육담을 기대했던 학생들과 교수들은 약간의 실망을 느낀 것 같았다. 평소에 글로 표현했던 것에 비해 강의 내용은 성적인 것이 적었다. 아마도 필화사건으로 인해 수위를 낮춘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필화로 고통을 겪을 때 그의 입장에서 ‘문학을 판사가 판단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도 있다. 그는 언제나 소년 같았다. 무게를 잡는 경우도 없었고, 소년처럼 웃기만 했다. 말수도 많지 않았고, 필자보다 나이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반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필자는 그가 말띠(1954년 생, 그는 1951년생이다)인 줄 알았다. 한 번도 나이를 얘기한 적이 없고, 위세를 부린 적도 없어서 그냥 ‘나보다 몇 살 위겠지’ 내심 생각했던 것이다. 망년우라고나 할까? 나이를 잊고 문학과 성에 관한 담론을 나누곤 했다.

2012년 1월 14일 서울 한남동 '꿀'에서 열린 마광수 교수의 ‘돌아가자, 장미 여관으로’ 시낭송과 미니 강의 모습.(43 Inverness Street Gallery)

같은 ‘문학과 성’이라는 강좌였지만 그는 현실과 미래의 성을 이야기했고, 필자는 설화와 문학에 나타난 과거의 성만을 이야기했다. 그는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성을 주장한 반면 필자는 늘 고전적인 성의식을 논했다. 그는 동성애나 일탈을 생활로 보았고, 필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 왔다.

그는 야한 여자를 좋아했지만 필자는 정숙한 여자를 좋아했다. 같은 것이 있다면 그와 필자는 동일하게 육담에 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표현이 거칠고 그는 육담을 해도 늘 진지했다. 아마도 필화사건이후에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돌이켜 보면 마광수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요즘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 재미없다고 한다.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나 <임마누엘 부인>에 비해 덜 야하다.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나 <즐거운 사라>는 그저 상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은 소설이다.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의 사상과 감정에 의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말이다. 소설을 가지고 그를 변태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주 만나서 속내를 털어 놓을 걸 잘못했다. 그가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떠나고 나니 뭔가 죄지은 기분이다. 나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지성인들이 다 같은 생각이리라.

야한 여자가 좋다던 마광수!
그는 결코 야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수하고 솔직했다.
오래 전, 술도 못 마시는 필자를 마전의 포장마차로 불러내서 그가 한 말이 귓전을 맴돈다.
“저요, 5년 동안 (섹스를) 한 번도 못했어요.”
소문날까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그 말만 남기고 이렇게 무심하게 우리 곁을 떠났다.

1989년에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고(故) 마광수 교수의 첫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자유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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