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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가부장제의 희생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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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가부장제의 희생양인가
  • 박한표
  • 승인 2017.06.2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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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의 그리스·로마 신화 읽기] <18-3> 모든 것을 건 사랑의 위험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 문학박사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랑 때문에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한 여성이 세 명 등장한다. 미노스를 돕는 스킬레, 테세우스를 돕는 아리아드네, 이아손을 돕는 메데이아다. 이 세 명의 운명은 똑같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은 위험하다. 이들이 모두 상대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사랑을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속도조절’에 실패해서다. 한꺼번에 다 걸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지키려면 갖고 있는 것을 조금씩 천천히 주어야 한다. 오비디우스가 가르쳐주는 ‘사랑의 기술’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고도 감당할 수 있다면 다 주어도 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이다. 세속적인 사랑을 넘어선 초월적인 사랑이다. 이 정도의 내공을 아직 쌓지 못했으면서 사랑에 빠졌다고 무턱대고 ‘올인’하는 것은 위험하다. 스킬레, 아리아드네,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말해준다.

또 한 가지 성찰. 사랑이 이뤄지려면 마음과 마음이 맞닿아야 한다. 사실 위의 세 여인은 자신들이 상대를 위해 한 일에 너무 의존했다. 사랑은 무엇을 해주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메데이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르고 호는 천신만고 끝에 그리스의 이올코스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르고 호 원정대가 고향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아폴로니오스 로도스의 <나르고나우티카>는 끝을 맺는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 나오는 이야기를 살펴봐야 한다.

이아손은 약속대로 이올코스에서 메데이아와 결혼해 아들 두 명을 낳았다. 그러나 숙부 펠리아스는 황금양피를 받고도 이아손에게 온갖 구실을 대며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메데이아는 이올코스의 권력을 이아손에게 찾아오기 위해 펠리아스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메데이아에게 아버지의 회춘을 부탁하는 펠리아스의 딸들’ 샤를 에두아르 쉐즈, 캔버스에 유채, 100.5×81.5㎝, 18세기 후반, 랭스미술관(Musée des Beaux-arts de Reims, 프랑스 랭스)

마법사였던 그녀는 우선 큰 솥에 여러 가지 약초를 넣어 생물을 젊게 만드는 약물을 만든다. 그리고 펠리아스의 두 딸들을 불러놓고, 늙은 양 한 마리를 토막 내 솥에 넣고는 약물을 뿌려 새끼 양이 나오는 시범을 보인다.

그런 다음 딸들을 꼬드겨 나이 든 아버지를 젊게 해주려면 먼저 아버지를 토막 낸 다음 솥에 넣으라고 한다. 그러면 자신이 젊게 하는 약물을 뿌려주겠다고 했다. 효성이 지극한 딸들은 메데이아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를 토막 내어 솥에 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약물을 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펠리아스가 죽었지만, 메데이아의 생각대로 이아손은 왕권을 이어받지 못했다. 원로회의에서 펠리아스의 아들 아카스토스가 다음 왕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펠리아스를 죽인 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아손은 가족과 측근들을 데리고 이웃나라인 코린토스로 망명을 떠났다.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는 이아손을 자기 후계자로 삼기 위해 딸 글라우케를 아내로 주기로 결정했다. 이어 메데이아와 자식들에게는 코린토스에서 추방령을 내렸다.

이아손은 크레온의 부당한 처사에 무언의 동조를 하며, 점점 옥죄어오는 위험에 처한 그녀를 수수방관하고 점점 멀리한다. 메데이아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자신과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비겁한 행동을 일삼는 이아손에게 절망한다.

‘격노한 메데이아’ 외젠 들라크루아, 캔버스에 유채, 260×165㎝, 1838년, 릴미술관(Palais des Beaux-Arts de Lille, 프랑스 릴). 이아손의 배신에 격노한 메데이아가 두 아들을 살해하고 있다.

이아손에게 배신당한 메데이아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녀는 이아손과의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과 이아손의 새 아내 글라우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이아손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선 남편의 새 아내인 글라우케를 독약으로 독살한 다음, 궁전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뒤 아테네의 아이게우스(테세우스의 친 아버지)에게로 도망쳤다. 아이게우스는 메데이아를 환대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아내로 맞기까지 했다. 테세우스가 크레타로 떠나기 전의 일이다.

그녀는 남편 이아손을 직접 죽이는 것보다 그를 평생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메데이아의 이러한 행적을 놓고 보면 그녀는 분명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인들 중 최고의 악녀다. 누가 사랑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동생을 죽이고, 나아가 자식까지 살해한 이 여인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우리피데스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보면, 메데이아는 원래 여신이자 사제이며 치료사였다. 의학(medecine)이라는 단어가 메데이아(Medei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그리스 최고의 악녀로 전락한 것은 그 당시 사회가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의 완전히 이행되는 과정에서 생긴 왜곡 때문이다. 메데이아를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 보고, 그녀를 복원시키려는 시도가 1970년 이후 여성 해방 운동의 영향으로 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가가 동독 출신의 여류 문인 크리스티나 볼프이다.

메데이아를 복권하려는 사람들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다시 읽으려 한다. 메데이아로 하여금 가족을 버리고, 동생과 자식들을 살해하도록 강요한 외부적인 정황에 주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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