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황량한 벌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상태바
황량한 벌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김형규
  • 승인 2018.05.07 14:41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22>착시현상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따분하고 지루한 길을 달릴 땐 가끔 자신의 그림자와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120번 도로를 따라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마을을 지나 5~6㎞쯤 북진하면 비둘기집으로 이름난 레디고스(Lédigos) 마을을 만난다.

레디고스 방면 도로는 오르막이다. 10㎞ 구간을 가는 동안 해발 830m에서 950m까지 서서히 높아진다. 크게 힘든 구간은 아니지만 황량한 벌판이 계속되므로 현장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압박을 받는다.

십수 년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한 적이 있었다. 중간에 모하비 사막을 지나치는데 착시현상에 빠졌다.

버스가 조금 전 지나쳤던 곳을 쳇바퀴 돌 듯 맴돌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듬성듬성 돋은 관목마저 똑같은 광활한 모래밭 속에서 방향감각이 마비됐다. 한동안 머릿속이 하얘지는 ‘멍때림’ 현상이 계속됐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마을 앞에서 도보순례자는 도로를 횡단해야 한다. 길을 건너는 도보순례자를 조심하라는 교통표지판.

우리나라 철도나 고속도로 주변은 다양한 산세와 농경지, 마을이 많이 형성돼 방향감각을 잃을 일이 거의 없다. 학창시절 기차나 버스로 통학을 했을 때 잠시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더라도 차창 밖을 살피면 도로표지판을 보지 않고도 거기가 어딘지 금방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건 심리적 안정의 밑천이다.

산에선 되도록 혼자 라이딩하는 걸 삼가야 한다. 몇 해 전 자주 다니는 대전 보문산을 혼자 자전거를 끌고 들어갔다가 순간 방향감각을 잃고 헤맨 적이 있다.

해는 저물어가고 당황스러워 급히 하산하는데 내려갈수록 길은 더욱 꼬이고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느라 체력이 바닥나 크게 낭패를 봤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입신의 경지, 무념무상의 페달링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황량한 벌판의 지루함도 잊을 수 있다.
고독과의 싸움이다. 차량편에 짐을 다음 숙소로 미리 보내고 가볍게 걷는가 하면 완전무장하고 고난의 행군을 감내하는 순례자도 있다.

체력이 고갈되고 코스가 힘들고 따분하면 잡생각이 뒤섞이고 얼른 라이딩을 끝내고 싶은 충동에 몸에 힘이 들어간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가져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기대치를 버리고 무념무상의 페달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 과거 기뻤던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 과정 또한 반드시 지나가리라’는 긍정적 마음가짐으로 편안하게 자전거를 탄다면 실제로 황량한 라이딩은 안개 걷히듯 지나간다. 자신의 그림자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하거나 동료 라이더와 주고받는 덕담은 더할 수 없는 청량제다.

무데하르 건축 양식으로 보이는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인근 농촌풍경.

산티아고순례길에선 우리의 다정한 벗인 순례 동지들을 가끔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다. 멀리서 그들을 발견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힘이 솟는다. 그들을 지나칠 때 눈을 마주치며 “부엔 카미노!”를 외치면 어김없이 밝은 미소와 함께 되돌아오는 “부엔 카미노!”에 위안을 받는다.

레디고스를 지나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마을에 도달하면 120번 도로는 231번 고속도로와 나란히 뻗는다. 231번 고속도로의 별칭은 산티아고로 향한다고 해서 ‘카미도 데 산티아고 고속도로’다.

칼사디야 데 라 쿠에사 마을 앞에서 도보순례자는 도로를 횡단해야 한다. 길을 건너는 도보순례자를 조심하라는 교통표지판.

산티아고 순례길과 120번 도로, 231번 고속도로 등 3개의 노선은 모라티노스(Moratinos) 마을, 산 니콜라스 델 레알 카미노(San Nicolás del Real Camino) 마을, 사아군(Sahagún) 도시까지 약 20㎞를 나란히 간다.

사아군은 산티아고순례길에선 반드시 거치는 중요한 역사 도시다. 중세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 특유의 무데하르(Mudéjar)라는 건축 양식이 남은 도시로도 유명하다. 앞선 21회 ‘부엔 카미노’편에서 ‘지형을 이용한 농촌 건축물이 이채롭다’라는 설명의 사진 속 건축물이 일종의 무데하르로 보인다.

대한민국산티아고순례자협회의 사하군편 설명에 따르면 ‘건물들이 폐허처럼 무너져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진흙과 짚을 섞어서 만든 소박한 벽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의 건축법은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라고 나와 있다.

레온까지 51㎞가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120번 도로표지판.

사아군으로 들어가는 시내 진입로를 외면하고 120번 외곽도로 지나친 게 못내 아쉽다. 아마 무미건조한 라이딩을 빨리 끝내고 싶은 조급증에서 해방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아군을 지나 칼사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 마을에서 길은 다시 갈라진다. 산티아고순례길은 231번 고속도로와 나란히 가지만 120번 도로는 남서쪽으로 휘어진다. 칼사다 델 코토부터 자전거순례자나 도보순례자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계속>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삼평동 2018-05-15 08:50:55
주말에 자전거로 산책하다가 자빠져보니 안전 주의 해야겠네요, 라이딩도 아니었지만 위험한 일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고 ~~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자전거 순례 마치신 것에 행운이 함께 하셨을듯. 글 잘 읽고 갑니다.

기계녀 2018-05-08 11:37:21
잘 읽고 갑니다. 순례의 길을 왜 고되게 떠나야하는지 의문이 들면서도 무념무상의 경지를 경험하기 전과 후의 인생이 확실히 다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진교영 2018-05-08 10:27:28
입신의경지 무상무념의 페달링
가슴에 와 닿네요
스트레스로 머리가 너무아파서 자전거를 타러 나갔습니다 아무생각없이 그냥 쭉 달렸습니다 계속달렸습니다 무상무념
집에오니 후련하고 개운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