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포스트 한지혜 기자] “300여m의 강폭에 탁류가 쏟아져 내리는 사고현장에는 변을 당한 가족들과 부락민들이 강가에 나와 울부짖었다. 행여나 기적을 고대하던 가족들은 거룻배에 어린 딸들의 시체가 끌려나올 때마다 몸부림쳤다.”
1978년 7월 20일 오전 8시 30분께 충남 연기군 금남면 용수천(龍秀川)에서 금호중학교 학생 18명을 태운 0.6톤짜리 철제동력선이 침몰했다.
용수천을 사이에 두고 용포리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100여명쯤 됐다. 성덕리와 연곡리, 도남리, 공주군 반포면 원봉리 등 7개 마을이다.
금남면 용포리와 성덕리는 용수천을 사이에 두고 800여m 떨어져 있다. 통학로에는 길이 30m의 다리가 하나 있는데 용포리 쪽에 놓여있었다. 용포리 쪽만 수심이 깊어서다. 학생들은 하천부지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장마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다. 잠수교인 용포리 쪽 다리가 물에 잠기는 것은 물론 성덕리 쪽 하천부지까지 강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배를 타지 않고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비는 사고가 나기 3일 전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용수천은 폭 300m의 강이 됐다. 수심도 3~4m에 이르렀다. 전날도 폭우가 쏟아져 학교에 가지 못했던 학생들은 이틀씩이나 결석하기 싫어 나루터에 모여들었다.
선주(船主) 민모(당시 23세) 씨는 수차례 학생들을 강 건너편으로 실어날랐다. 친구, 동생들을 먼저 보낸 마지막 18명이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렸다.
배는 강 건너편 용포리에 배를 대기 직전이었다. 다리 앞에서 시동을 껐는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선수 쪽에 쏠린데다 너무 많은 인원이 타고 있던 터라 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날 사고로 16살짜리 딸을 잃은 이모(당시 46세) 씨는 “강물이 불어 오늘은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2일씩이나 결석할 수 없다고 집을 나서더니 변을 당했다”고 통곡했다.
배가 가라앉자 선주 민 씨와 남학생 3명은 헤엄쳐 목숨을 구했지만 15명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여학생이 14명, 남학생이 1명이었다. 선의(善意)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려던 민 씨는 중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사고 원인이 소형어선에 많은 학생들이 승선한데 있으나 지역주민의 숙원인 용수천 교량 건설이 항구적인 대책인 만큼 소요자원을 전액 지원해줄 테니 조속한 시일 안에 교량을 건설하시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고발생 4일 후 역시 고인이 된 정석모 당시 충남도지사에게 지시한 내용이다.
용포리 쪽 잠수교 상류 1㎞지점에 길이 200m, 폭 6m의 성덕교는 그렇게 놓여졌다. 1억 5000만원의 사업비는 전액 국고로 지원됐다. 사고 발생 한 달여 후인 8월 31일 착공해 넉 달이 채 걸리지 않은 12월 28일 준공했다. 높이가 10m여서 홍수가 나도 마음 놓고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준공식 날에는 성덕교 건립을 있게 한 어린 넋들을 달래는 위령비 제막식도 함께 열렸다.
비로소 장마철만 되면 고립됐던 이 일대 마을에 통행의 자유가 주어졌다. 어린 넋 15명의 희생이 있고나서였다.
※ 참고 : 경향신문(1978년 7월 20일자, 7월 24일자, 12월 27일자), 매일경제(1978년 7월 24일자)
그길을 지날때면 생각나고...그친구들이 아른 거립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