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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다르지 않은 생태계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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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다르지 않은 생태계의 운명
  • 이충건
  • 승인 2016.12.0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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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건의 지구촌 생태여행] <4>세인트헬레나
'1794년의 제임스타운' 동판화, 1813년, 영국 런던.

앙골라에서 1850㎞, 브라질에서 3500㎞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Saint-Helena). 섬이라기에는 다소 작은 123㎢의 면적이다.

이 섬의 이미지는 황제의 그림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나폴레옹은 1815년부터 1821년까지 이 섬에서 체류했다. 나폴레옹은 1815년 10월 16일 섬에 도착한 날 단 하룻밤만을 ‘수도’라 할 수 있는 제임스타운(Jamestown)에서 보냈다. 1821년 5월 5일 죽는 날까지 롱우드(Longwood) 하우스에 칩거했다.

세인트헬레나는 1502년 포르투갈 탐험대에 의해 발견됐다. 1633년 네덜란드에 병합됐다가 1659년 절대 권력자인 동인도회사의 차지가 됐다. 1834년 마침내 섬은 동인도회사로부터 임대돼 영국왕실에 양도됐고 그곳에 나폴레옹의 유배지가 만들어졌다.

염소 떼의 상륙과 함께 맞이한 대멸종

나폴레옹이 최후를 맞이한 롱우드 하우스.

세인트헬레나 식물의 역사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가장 긴 첫 단계는 전적으로 자연의 힘에 의존하는 시기다. 1502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다.

두 번째 단계는 그 다음 3세기에 걸쳐 펼쳐진다. 나폴레옹이 섬에 체류하기 직전인 1805~1810년 사이 최초의 식물학 연구가 이뤄졌다. 이 두 번째 단계에 염소를 비롯한 가축 떼가 섬으로 유입됐다. 이로 인해 수많은 풍토성 식물이 과잉방목과 과잉소비라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지난 두 세기를 포괄하는 세 번째 시기는 식물의 진화에 관련된 관찰 등 우리에게 진지하고 신뢰할만한 연구결과를 남겼다.

첫 번째 시기에 섬의 식물은 아주 오래된 화산대 위에서, 생태학의 태고시대부터 전해진 자연의 법칙대로 살았다. 거기에 기후의 변화가 개입해 대륙으로부터 씨앗의 이주, 진화의 장난에 의한 종의 변이가 풍토성 종을 탄생시켰다.

1502년 8월 18일은 ‘세인트헬레나 데이’다. 포르투갈 인들이 숫처녀의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딘 날이다. 인간과 포식자 가축, 특히 염소의 상륙은 300여년에 걸쳐 수천 년간 지속된 균형을 완전히 흔들어 놨다. 후커는 섬에서의 첫 번째 식물학 연구를 스케치하면서 1805~1810년 이전에 수많은 풍토성 종이 사라졌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세인트헬레나의 주도인 제임스타운.

신속하게 이뤄진 섬의 벌채는 특히 염소에게 그 책임이 있었다. 다른 많은 섬에서와 마찬가지로 1513년부터 기나긴 해상 여행길에 긴요하게 쓰일 식량 저장고를 구축하고 난파당했을 경우를 대비해 염소 떼가 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시대 관찰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염소 떼가 거의 2㎞ 길이에 달했다고 한다. 닥치는 대로 씹어대는 염소 이빨의 놀라운 능력 때문에 세인트헬레나는 완벽하게 벌거숭이가 됐다. 가장 질기고 가장 뾰족한 가시덤불까지 요깃거리로 삼을 수 있는 포식자의 이빨에 어떠한 풀, 어떠한 관목도 버텨내지 못했던 것이다.

산에서든 평원에서든 염소의 민첩함은 그 어떤 절벽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염소 떼를 통제해야만 했는데, 1950년부터 비로소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세 번째 단계는 보다 낙관적인 전망에 다다른다. 비록 대부분의 풍토성 식물이 오늘날 소멸직전까지 다다랐지만 최소한 수십 종을 보호하기 위한 칭찬할만한 노력이 있었다. 이때부터 희귀식물에 대한 추적의 길도 열렸다.

‘구원자’ 조지 벤자민, 그리고 엇갈린 운명

조지 벤자민이 구원한 세인트헬레나의 두 흑단나무. 왼쪽의 세인트헬레나 올리브는 결국 멸종했고, 오른쪽 세인트헬레나 에보니는 2000여 개체가 식재됐다.

그 추적의 결과로 얻어낸 첫 번째 성과는 세인트헬레나 올리브(네시오타 엘렙티카, Nesiota elleptica)다. 이 식물은 정확하게 말해 올리브가 아니라 검은오리나무(Black alder)군에 속한다. 이 식물은 소멸한 것으로 보고됐다가 1977년 재발견됐다.

이 작은 나무는 처음엔 다이아나 봉(Diana’s Peak) 주변 섬의 고지대에서 역시 세인트헬레나의 풍토성 식물인 고사리(Dicksonia arborescens)와 섞여서 자라고 있었다. 1659년 동인도회사가 섬을 차지했을 때 이 나무가 땔감으로 아주 적절하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나무는 곧 베어내지기 시작했다. 1875년 J.M.멜리스는 세인트헬레나에 대한 글에서 섬에는 12~15그루만이 남았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 후 섬에서는 더 이상 나무가 발견되지 않았다.

섬에서 그 나무가 다시 발견된 것은 1977년 8월이었다. 세인트헬레나의 식물학자 조지 벤자민이 다이아나 봉 근처에서 나무를 재발견했던 것. 벤자민은 나무의 열매를 옮겨 갔고 멸종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조할 수 있었다.

세인트헬레나 올리브는 드물게 씨앗을 가지고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꺾꽂이 한 경우 수십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증거가 될 수 있는 결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씨앗에서 얻어낸 새싹 두 개를 마침내 모종했지만 그것들은 생명을 보전하지 못했다. 2003년 결국 세인트헬레나 올리브는 멸종된 식물의 리스트에 그 이름을 올렸다.

완전히 사라져버린 종의 마지막 개체를 목도하면서 받게 되는 감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자기 주위에서 동족이 사라져 가는 걸 보다가 결국엔 홀로 남게 된 한 종의 마지막 개체에 인간의 존재를 대치시켜 보자. 어떤 번식수단도 상실한 채 자신의 최후, 인류의 소멸을 기다려야 하는 그런 상태를.

녹슨 대포가 즐비한 세인트헬레나 해안.

흑단나무인 ‘세인트헬레나 에보니’(트로케티옵시스 멜라녹실론, Trochetiopsis melanoxylon)는 칠흑같이 검은 나무로, 이미 한 세기 전 소멸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1980년 11월 조지 벤자민이 절벽 위에서 두 그루의 소관목을 발견했다.

흑단나무의 품위 있는 목재는 근사하게 세공됐고, 나무껍질은 가죽을 무두질하는 데 사용됐다. 그러나 이 같은 용도만으로 세인트헬레나처럼 협소한 섬에서 한 식물종이 소멸에 이를 수는 없었을 터. 그 시대에 흑단나무 목재는 석회를 생산하기 위한 목탄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석회는 섬의 가장자리 도처에 요새를 세우기 위해 시멘트로 변형됐다.

결국 엉망진창의 회반죽이 이 나무에 숙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이다. 1980년 재발견 당시 꺾꽂이에 의한 묘목의 보급이 시도됐다. 그리하여 섬에 2000여 개체가 식재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하나의 종이 구원된 셈이다. 조지 벤자민이 구원한 세인트헬레나 올리브와 트로케티옵시스는 섬의 우표 디자인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대양의 한가운데 감금된 식물들의 운명

바다에 인접한 접근 불가능한 벼랑 위에서 자라는 펠라르고니움 코틸레도니스.

카카오나무 군에 속하는 붉은 색 트로케티옵시스 에리트록실론(Trochetiopsis erythroxylon)은 오늘날 자연계에서 유일한 개체로 존재하는 식물이지만 구원받은 종이다. 생식에도 성공을 해 여러 식물원이 현재 이 식물의 어린 개체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자신의 형제인 흑단나무처럼 이 나무도 염소 떼의 희생자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타닌을 추출하기 위해 이 나무의 목재와 나무껍질을 채취했던 인간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붉은색 트로케티옵시스의 꽃은 지름이 5㎝가 넘는다. 처음에는 눈부시게 흰색이었다가 곧 장밋빛으로, 그리고 남쪽에 봄이 만개하는 11월에는 적갈색을 띤다. 과장되게 말하지 않더라도, 모든 식물학자는 이 나무의 꽃을 틀림없이 식물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중의 하나로 여길 것이다.

세인트헬레나 또한 아프리카 대륙과 친족관계를 형성한다.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여기저기에 여러 종이 공통적으로 분포하는 트로케티옵시스가 그 증거다.

펠라르고니움 코틸레도니스(Pelargonium cotyledonis)도 마찬가지. 식물학자들은 펠라르고니움을 남아프리카에 널러 퍼져 있는 제라늄의 일종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세인트헬레나 펠라르고니움은 ‘위기에 처한 종’들의 목록, 그 중에서도 소멸 직전의 마지막 단계에 등장한다. 펠라르고니움은 바다에 인접한 접근 불가능한 벼랑 위에서 자라기 때문에 염소 떼도 이 식물을 찾아낼 수 없었다. 펠라르고니움은 그런 곳에서 물도 흙도 없이 몇 달 동안 살아갈 수 있다.

데이지와 비슷한 생김새의 덤불국화과 식물인 콤미덴드론(Commidendron rugosum)도 거의 사막 같은 조건이나 물보라에 의해 소금기가 생긴 토양 위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이 국화과 식물은 자갈밭에 잎을 떨어뜨리는데, 이는 스스로에게 퇴비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인트헬레나의 상징으로 선포된 고무나무 콤미덴드론 로뷔스툼과 나무의 이미지가 새겨진 우표(원).

세인트헬레나를 떠나기 전에 벼랑 위의 국화과 식물과 아주 가까운 사촌인 고무나무(콤미덴드론 로뷔스툼, Commidendron robustum)에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하자. 그 옛날 섬의 지배자였던 교목성 종인 이 고무나무는 건축목재 역할을 맡았었다.

세인트헬레나의 고무나무가 가진 매력은 1977년 섬의 상징으로 선포됐을 정도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 바람에 이 나무는 매우 정확한 개채 조사의 대상이 됐다. 그 조사로부터 총 600 그루가 세어졌는데, 특히 롱우드에 있는 나폴레옹의 거주지 근처에서 많이 발견됐다.

불안정한 식물군, 특히 야생 염소 떼와 인간의 과잉 채집에 의해 위기에 처한 식물군의 목록은 이쯤에서 접고자 한다. 개체가 하나, 둘 세어지는 식물의 분포란 분명 상상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이충건 세종포스트 대표 겸 편집국장

이 같은 환경조건, 특히 섬의 환경조건은 육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육지에서는 균형의 단절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지 않으며 식물군의 확장 가능성도 뚜렷하게 크다. 육지에서 식물은 씨앗을 매개로 불쾌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나은 자생지로 피신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양의 한 가운데 감금된 상태로 놓인 섬의 식물에게는 어떠한 도피 가능성도 남겨져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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